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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1185

[제4강]함석헌의 역사철학 - 생명의 원리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03 10:15]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 역사철학의 세 가지 원리 2. 생명의 제2원리는 고난 함석헌은 비관주의자이거나 고난을 미화하는 자기학대증 사상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직하다.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따른다는 원리를 정직하게 대면한다. 특히 물리적 운동차원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차원에서 인간 개인이나 공동체가 악보다는 선, 불의보다는 정의, 추함보다는 아름다움을 결단적으로 선택하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감내하여야 하는 고난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점을 직시한다. 우주의 물리적 법칙으로 중력의 법칙이나 열역학의 법칙으로서 엔트로피 법칙이 존재하는 한, 인간생명이 신체적으로 꼿꼿이 바르게 서서 직립보행 하거나 정신적나 영적으로 생명을 .. 2020. 2. 7.
[제2강] 함석헌의 마지막 수업-조선역사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06 10: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조선역사’의 마지막 수업 오산학교교사는 함석헌의 유일한 학교경력 저명한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직후에 함석헌은 서울대학교 역사학 교수로 임용될 뻔 했다고 한다. 또 월남하기 직전에는 김일성대학에 취직하러 간다는 명분으로 혹시 모르는 시베리아 유형의 길을 벗어나기도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그는 서울대학교나 김일성대학교의 역사학 교수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제 때 오산고등보통학교 역사선생의 자취는 유일한 그의 학교선생 경력으로 알려져 있다. 즉 1928년 4월부터 1938년 3월까지 10년간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 학생들은 그가 자신의 뼈를 묻기로 한 그 학교를 왜 떠나야 했는지 더 잘 알.. 2020. 2. 7.
[제4강] 청소년 피를 빨아먹는 특권계급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08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교육자 함석헌을 말한다-4] “학교 뒤에는 청소년의 피를 빨아먹는 특권계급이 있다” 함석헌의 반자본주의 교육관 다음, 함석헌의 반자본주의 교육관은 여전히 새롭다. 이른바 사교육이란 거대한 괴물의 출현을 이미 50년 전에 예고한 것처럼 보인다. 그 동안 권력교체가 이루어지고, 역대 대통령들도 무척이나 교육개혁을 외우고 다녔지만,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적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학교체제와 교육풍토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모든 제도ㆍ표준이 자본주의 경제조직 위에 놓여 있다.……자본주의는 형식적으로 자유나 인격주의와 일치되는 것이므로 제도상으로는 계급도 없고 인격의 차.. 2020. 2. 7.
[제6강] 과거로부터 온 비젼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0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교육자 함석헌을 말한다- 6] “과거로부터 온 비젼” 함석헌이 걸어간 교육자의 길 - 아무나 가지 않은 길 우리 교육의 미래는 함석헌이 걸어간 교육자의 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길은 그가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걸어간 참교육자의 길이요 “교육을 직업으로 아는 가련한 인생”들이 무리를 지어가던 속된 길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읊은 ‘풀이 더 있고 사람의 자취가 적어/아마 더 걸어야 될 길’처럼 아무나 “가지 않은 길”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조선총독부에 의해 ‘찍힌 선생’이 되고, 소련군에 의해 ‘사형수’가 되고, 이승만독재에 의해 ‘빨갱이’가 되고, 박정희독재에 의해 ‘정신분열증 늙은이’가 되고, 전두환.. 2020. 2. 7.
[일요시론]사람답게 사는 새세상을 만들자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1 09: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일요시론-2] 사람이 진정으로 가야할 길 우리나라 최초로 차별없는 세상을 주장한 정여립 기축년 새해다. 2008년에 광우병문제로 이나라 강산이 떠들석하더니만 기축년이 되자 사람들은 평생 우직하게 일하다가 모든 것을 내놓고 가는 우공(牛公)을 본받자고 한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지만 사람마음같이 복잡한 곳이 있을까싶다. 기축년하면 그래도 퍼득 떠오른것이 기축옥사이다. 조선시대 선조 22 년(1589년)에 조선조 최대의 역모사건 즉, 기축옥사가 일어났는데 바로 기축년이다. 유교적 질서속에서 정여립이 꿈꾸는 것은 신분의 차별없는 세상, 대동(大同)의 세상이었다. 정여립이 살던 당시는, 양반이 아니면 사회중심부에 접.. 2020. 2. 7.
[제1강]탈민족주의가 우리시대의 조류인가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2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그리스도교민족주의’ 그리고 ‘통일민족주의’- 1] 들어가는 말 탈민족주의가 우리시대의 조류인가. 각 나라마다 역사의 발전단계는 다르다. 1990년대 초의 탈근대주의(postmoernism)와 1990년대 말의 신자유주의 세계화(globalization) 기운에 의해 국제협조ㆍ국제연대가 확산되는 등 세계경제의 기본토대가 변함에 따라 ‘민족주의’도 ‘탈민족주의’로 가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복거일, 《국제어시대의 민족어》, 문학과지성사, 1988; 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1999; 박찬승, 《민족주의의 시대-일제하의 한국 민족주의》, 경인문화사, 2007) 이에는 뉴라이트계열의 학자들.. 2020. 2. 7.
[제2강] 그리스도교민족주의 성립배경과 특질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3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와 통일민족주의-2] 그리스도교민족주의 성립배경과 특질 그리스도교민족주의는 항일민족주의다 한국에서 ‘그리스도교민족주의’가 성립되는 시대적 배경은 20세기 전반기 조선사회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침략당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에서 발생한다. 당시 조선 땅은 조선인으로서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보금자리였으나, 그리스도교도로서는 하느님이 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그 땅이 외세에 의하여 약탈당하고 있었다. 같은 운명적 현실에 직면하게 된 그리스도교와 한국민족주의는 서로 감흥(感興)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신앙적 토대에서 볼 때 고난에 처한 민족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閔庚培, 1.. 2020. 2. 7.
[제3강] 그리스도교민족주의의 동태화와 함석헌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4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와 통일민족주의-3] 그리스도교민족주의의 동태화와 함석헌 그리스도교민족주의의 동태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종교적 신앙의 측면과 민족적 양심의 측면이 결합하여 형성된 ‘그리스도교민족주의’는, 시대의 ‘반동적 권력’들이 인민에 대한 압제를 달리할 때마다 이에 저항하는 태도 또한 달리하였다.(이만열, 1981) 개화기 그리스도교민족주의는 근대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의 청년들에게 민족공동체가 직면한 민족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의식을 고취시켜 주었다. 일제침략기는, 식민지사회가 일반적으로 겪는 조직적 공백 상태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던 종교조직을 민족주의운동의 제도적 공간으로 .. 2020. 2. 7.
[제4강]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 실체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와 통일민족주의-4]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 실체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 형성배경 그러면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 형성 배경과 그 실체에 대하여 알아보자. 함석헌은 ‘그리스도교민족주의’에 입각한 저항정신ㆍ민족주의ㆍ자유정신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 그가 이러한 사상을 갖게 되는 배경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평안도라는 지역적 환경과 개인적 가정환경이고, 둘은 오산학교 학창시절이고, 셋은 일본 동경유학시절의 우찌무라 간조와 만남이다. 함석헌이 일제식민지라는 역사현실 속에서 저항정신을 갖게 된 데에는 평안도라는 지역적 특성이.. 2020. 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