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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

[제2강] 함석헌의 마지막 수업-조선역사

by anarchopists 2020. 2. 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06 10: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조선역사’의 마지막 수업

오산학교교사는 함석헌의 유일한 학교경력

저명한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직후에 함석헌은 서울대학교 역사학 교수로 임용될 뻔 했다고 한다. 또 월남하기 직전에는 김일성대학에 취직하러 간다는 명분으로 혹시 모르는 시베리아 유형의 길을 벗어나기도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그는 서울대학교나 김일성대학교의 역사학 교수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제 때 오산고등보통학교 역사선생의 자취는 유일한 그의 학교선생 경력으로 알려져 있다. 즉 1928년 4월부터 1938년 3월까지 10년간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 학생들은 그가 자신의 뼈를 묻기로 한 그 학교를 왜 떠나야 했는지 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선생의 수업 도중에 갑자기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도(道)의 시학관이 교장 선생과 함께 교실로 들이닥쳤다. 예고 없이 급습하여 (함석헌)선생이 우리말로 강의하는 현장을 적발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이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일본말로 강의를 계속하시었다.……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선생께서는 학교를 떠나시었다. 잘은 모르지만 이 사건과 선생의 사임과는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졌다. 그래서 그 수업시간은 실질적으로 선생의 ‘마지막 수업’으로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나는 그 뒤 『뀌리 부인전』을 읽으면서 제정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폴란드에서도 그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던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그 ‘마지막 수업’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기백, “함선생의 속마음”,『함석헌선생추모문집』)

한국사학자 이기백이 생전에 회고한 오산고보 3학년 때의 목격한 교실풍경이다. 함석헌은 조선총독부 학무과에서 금지한 조선어로 금지된 ‘조선역사’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의 역사수업은 반드시 일제(日製) 교과서를 일본말로 가르쳐야 한다는 학무과의 지시를 정면에서 거스르는 행위였다. 그 만큼 학생들의 기억은 어떤 울분과 긴장 때문에 더욱 생생했을지 모른다.

일제의 우민화정책에 저항하다

기막히게도, 그렇게 ‘조선역사’를 배운 경우는 그때 한반도 전체에서 평안도 오산고보 학생들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이제 자신의 민족교육을 더 이상 실천에 옮길 수 없다고 판단하자, 역사선생은 주저없이 학교를 떠나고 만다. 바야흐로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제는 우민화정책에 따라 고등보통학교 명칭을 중학교로 격하시키고, 황국신민화교육을 노골적으로 강행하려 들 때였다. 해방 후 월북한 교육사가 이만규도 민족교육자 함석헌의 모습을 “함 모”라고 부르면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강한 민족적 양심이 일본인의 제도에 굴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하며, 일본어로 교육하라는 학무과 지시를 듣지 않고 교육계에서 떠난 이들이니, 오산중학교 함 모, 중앙중학의 문 모가 이런 예였다. 이 부류는 소수였다. 그 가운데에는 일본어가 유창함에도 불구하고 차마 못하겠다고 나온 이도 있었다.”
(이만규,『조선교육사II』 거름)

한창 지구를 휩쓸던 민족주의 시대에 도리어 민족적 정체성을 지킨 우리 교육자는 무척이나 귀했다는 것이다. 학교선생의 수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전략에 따라 극소수로 제한되었을 때였다.

참고로, 역사선생 함석헌이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하던 1935년에 한반도를 통틀어 5년제 고등보통학교 교원 수는 일본인 400여명을 포함해서 모두 800명 미만이었다. 또한 남녀 학생 수도 겨우 2만 명을 넘겼는데,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약 2천 2백만 명의 조선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고용했던 일본인 관리 5만 2천 명의 절반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 숫자였다.

우리는 인생의 후반기에 박정희 군사독재와 싸우던 재야인사 함석헌을 기억한다. 그 모습은 오산고보에서 ‘조선역사’를 가르치던 역사선생이 원형일 것이다. 이 반체제 인사는 언제나 극소수에 속하는 ‘영원한 젊은이’였다. 어느 해 정월, 그의 ‘친구’로도 불리우는 안병무는 함석헌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불을 머금은 사나이처럼 그 안에는 정열이 이글거리고 태평양의 물결을 가슴에 안은 것처럼 그의 사고는 언제나 격동한다.”(안병무,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진실 때문에』)

과연 청년교사 함석헌과 ‘영원한 젊은이’ 사이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이글거리는 ‘정열’과 격동하는 ‘사고’는 함석헌의 양심이 부인하는 학교교육과 또한 현실적으로 그의 교육관을 부인하는 제도교육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열쇠가 아닐까?
                                                                         
이치석 선생님은
함석헌의 역사관
* 이치석 선생님은, 프랑스 아미앙대학교 역사학 박사과정(D.E.A)수료하였으며, 함석헌의 "씨알교육"을 우리나라에 보급하려 애써오셨다. 현재"씨알의 소리"편집위원으로 계신다

* 저서로는『씨알 함석헌평전』『전쟁과 학교』가 있고, 공저로는『황국신민화교육과 초등학교제』외 다수가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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