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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민족

[제4강]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 실체

by anarchopists 2020. 2. 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와 통일민족주의-4]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 실체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 형성배경

그러면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 형성 배경과 그 실체에 대하여 알아보자. 함석헌은 ‘그리스도교민족주의’에 입각한 저항정신ㆍ민족주의ㆍ자유정신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

그가 이러한 사상을 갖게 되는 배경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평안도라는 지역적 환경과 개인적 가정환경이고, 둘은 오산학교 학창시절이고, 셋은 일본 동경유학시절의 우찌무라 간조와 만남이다.

함석헌이 일제식민지라는 역사현실 속에서 저항정신을 갖게 된 데에는 평안도라는 지역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서(關西)지역은 삼남과 달리 계급의식이 희박하였고 중앙으로부터 부세(賦稅)의 수탈이 심하여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이 심했던 곳이다.


이런 까닭으로 그리스도교(개신교)의 전파가 다른 지역보다 용이하여 그리스도교를 통한 근대 시민교육 또한 일찍 접하고 있었다. 그래서 함석헌 집안도 그리스도교를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함석헌이 민족주의를 갖게 되는 데는 집안분위기도 한 몫을 한다. 집안의 ‘맨 처음 정신적 스승’으로서 한학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함일형(咸一亨)과 그의 둘째 아들, 곧 일제 침략기 3·1독립만세운동 때 평양의 숭덕학교 교사로서 학생동원의 책임을 졌던 함석은(咸錫恩)의 영향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시 함석은에게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살포하기도 하였다. 그 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1907. 12. 개교)에 다니게 되었다.(1921~23),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李昇薰)이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이다. 그래서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6년 입학식에서는 교사들이 한복차림이었고 진행도 우리말로 하였다. 여기서 함석헌은 오산학교에 다니면서 이 학교 교사였던 이승훈ㆍ조만식(曺晩植) 등으로부터 ‘자주적 민족독립과 주체적 민중의식을 영향 받게 된다.

오산학교를 마친(1923) 함석헌은 이승훈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동경고등사범학교(現 쯔꾸바대학) 문과에 입학하여(1924~28) 역사ㆍ윤리 등을 전공한다. 여기에서 함석헌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을 통하여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 그가 이끌고 있던 <성서연구모임>에 나가게 된다.

함석헌은 우찌무라로부터 이집트 노예로 끌려간 이스라엘민족에 관한 ‘예레미야 강의’를 들으면서 인간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게 된다. 함석헌은 곧바로 김교신ㆍ송두용(宋斗用, 1904년~1986)ㆍ정상훈(鄭相勳)ㆍ유석동(柳錫東)ㆍ양인성(楊仁性)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하여(1925) 희랍어 원문으로 성서연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라는 표어를 걸고《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한다.(1927. 7, 도쿄) 함석헌은 이 잡지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글을 연재하였다.(1923 ~33)

이를 통하여 함석헌은 "민족과 신앙"을 같은 선상에 두는 사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글은 뒤에 단행본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출간되었다.(1950. 3) 이렇듯 그를 태어나게 한 지역과 집안은 그를 그리스도교 신자로 만들었고, 그가 살던 시대, 곧 오산학교와 동경유학시절은 그를 민족주의자로 만들었다. 그 결과 함석헌은 ‘그리스도교민족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 실체는 씨알이다
그러면 함석헌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 실체는 무엇인가. 함석헌은 한국역사에 대하여 “고난의 역사-한국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기조는 고난이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1962년판, 84쪽, 이하 咸錫憲)라 하여 한국역사를 그리스도교 《구약성서》와 연결시켜 하느님이 준 ‘고난’(苦難)의 역사로 보았다. 그리고 한민족의 삶을 ‘고난공동체’로 규정하였다. 이 말은 어찌 보면, 숙명론 내지 패배주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함석헌은 하느님이 우리민족에게 고난을 준 데에는 뜻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곧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면류관”(咸錫憲, 86쪽)이라고 하였다. 이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가시면류관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처럼 한국인의 ‘고난의 면류관’ 뒤에는 하느님이 예비하신 희망의 약속이 있다고 보았다.(咸錫憲, 452쪽)


함석헌이 생각하는 하느님이 예비하신 민족의 희망은 먼저 우리 씨알들이 민족의 사명을 깨닫는 희망이요, 남북이 민족통일을 달성하는 희망이요, 씨알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희망이었다. ‘역사의 실천성’을 중시하고 민족주체성을 강조하였던 함석헌은 씨알을 우리 역사의 주체세력으로 내세웠다.(<가시나무가지의 외침>, 1979) 정치인이나 경제인, 그 누구도 아닌 씨알만이 하느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 곧 통일된 조국, 정의사회, 희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함석헌은 한국민족의 역사에서 직접적인 민족고난의 담지자 세력은 민중(씨알)이라고 하였다.(咸錫憲, 103쪽) 이런 생각에서 함석헌은 씨알을, “씨알은 약하고, 못생겨 욕심 부리지 않는” 존재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5천년 악독한 정치에 짜 먹히고, 짓밟히면서도 멍청인 듯 살아가며, 온갖 힘든 노동은 다 하고 그러면서도 제대로 보수도 찾지 못하면서 그저 단 하나 소망이 이 나라에 나서 이 나라에 죽어 살아서는 힘과 생각으로, 죽어서는 살과 뼈가 거름이 되어 나라와 하나님께 봉사하는 씨알이 이 ‘한’의 표현이다”(<슬픈 노래 부르자>, 1977) 라고 하였다.

이렇듯 함석헌은 이 땅에서 고난의 상징이요, 한(恨)의 대명사인 씨알을 민족과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존재라고 파악함으로써 그의 ‘그리스도교민족주의’의 알짬을 씨알에 두었다. 그래서 씨알은 불의에 저항하고 독재권력에 저항하고 자본권력에 저항하는 존재로 보았다. (황보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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