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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

[제6강] 과거로부터 온 비젼

by anarchopists 2020. 2. 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0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교육자 함석헌을 말한다- 6]



“과거로부터 온 비젼”

함석헌이 걸어간 교육자의 길 - 아무나 가지 않은 길

우리 교육의 미래는 함석헌이 걸어간 교육자의 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길은 그가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걸어간 참교육자의 길이요 “교육을 직업으로 아는 가련한 인생”들이 무리를 지어가던 속된 길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읊은 ‘풀이 더 있고 사람의 자취가 적어/아마 더 걸어야 될 길’처럼 아무나 “가지 않은 길”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조선총독부에 의해 ‘찍힌 선생’이 되고, 소련군에 의해 ‘사형수’가 되고, 이승만독재에 의해 ‘빨갱이’가 되고, 박정희독재에 의해 ‘정신분열증 늙은이’가 되고, 전두환군부에 의해 군사재판정에 설 때까지 그는 끊임없이 감옥을 드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인권운동가로서 꼭 30년 전인 1979년 초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교육을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교육자 함석헌은 「조선역사」를 저술한 역사가가 되고, 고향에서 흙을 파는 농부가 되고, 옥중에서 시인이 되고, ‘타고난 언론인’이 되고, 그리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겨레의 할아버지’로 나서게 된다.

그러나 그 다양한 모습들 속에서 만나는 것은 청년교사 함석헌의 인격이었다. 예컨대 좌익학생들이 학교운동장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선생들을 공격할 때였다. 함석헌도 집단폭행으로 쓰러지고 만다. 얼마 후에 그 학생 대표들은 교무실로 찾아온다. 자신들이 존경하는 선생마저 폭행한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빌기 위해서다. 그 자리에서 한 학생이 “아까 저희들이 때릴 때 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맞았느냐?”라고 묻는다. 그러자 “나도 사람인데"라면서 나중에 나를 때린 학생을 보게 되면 분한 마음으로 "저놈이 나를 때렸지" 할까봐 그랬다고 들려준다.

참교육자- 농사꾼의 심정

이 얘기는 그들이 알린 것인데, 나이 30대 초의 교육자의 인격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특히 나이 80에 이를 때까지 스승 유영모가 자신을 혐오스럽게 비난하는데도, 언제나 그 앞에서는 두 무릎을 끓고 앉아 목묵히 예의를 차렸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일제 때 신의주경찰서, 평양경찰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수 차례 수 년간 옥고를 치렀지만 자기는 단 한 번도 “일본놈”이란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해방 후에는 김일성 정권에 의해서 제3차 숙청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집도 절도 없이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졌졌지만 그 조치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 중일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된 것이 이유였는데 그때 그 상속을 포기하려다 말았던 자신을 후회하면서 도리어 시대의 심판으로 흔쾌이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이어 월남한 뒤에도 반민중적인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권력에 저항하면서 역시 숱한 투옥과 연금과 모욕을 당했지만 정말이지 증오심으로 그들 권력자 개인의 인격을 멸시하거나 비하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삼던 서슬퍼런 박정희 유신독재 때는 학교와 사회에서 오랫동안  통용되던 “북괴”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처음 주장한 사람이 함석헌이었다.

거기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적하는 야수의 본성도 없고, 야수의 생존철학을 내장한 이기적인 노림수도 없었다. 그 '싸우는 평화주위자'의 얼국에는 오직 민족적으로나 인류적으로 "같이 살아야 한다"는 밝은 도덕성만 보였다. 그렇게 교육자 함석헌은 역사의 숲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그가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는 농사꾼의 심정이라면서 만긴 것이 "씨알"이었다.

과거로부터 온 비젼

과연 정보화시대의 메모리카드 혹은 칲과 같이 '씨알'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깊은 해석으로 가득 차 잇다. 그에 따르면, 본디 '씨알'이란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의 평화스런 모습(民)이다. 만약 집에 물이 났을 때는 무엇보다 급히 그 아기부터 구해야 하는데, 그 아기를 구하지 못하는 현실이 바로 우리 교육이 직면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씨알에 돌아가는 태도"에서 찾았다.


걸어온 함석헌의 삶은 교육자의 비극을 보여준다. 그 파란만장한 자취야말로 시대의 교육자료가 분명하다. 교육이란 “인간살림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그에게 그 역사풍경은 마치 불 난 집과 같았다. 그때 그는 무엇보다 급한 일은 아기를 구하는 일이라면서 이를 일컬어 “씨알교육”이라 불렀다.

“.......우리는 나를 건지고 나라를 건지고 세계를 건지는 교육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이러한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또 인류적으로 모든 낡은 껍질과 찌꺼기를 청산해버리고 새 우주적인 시대를 여는 교육은 씨에 돌아가는 태도로만 될 수 있다. 그밖에 길이 없다. 그것을 회개라고 할까? 씨은 과거의 총결산인 동시에 또 거기서의 비약이다. 그 비약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가 하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 반성돼야 할 몇 가지 문제”, 『씨알의 소리』1973년 2월호)

그것은 그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던 길 위에 세운 역사의 이정표였는지 모른다.그것을  “씨알교육”이라고 불렸다. 샤르뎅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분명히 “과거로부터 온 비젼”이 분명하다.


이치석 선생님은
함석헌의 역사관
* 이치석 선생님은, 프랑스 아미앙대학교 역사학 박사과정(D.E.A)수료하였으며, 함석헌의 "씨알교육"을 우리나라에 보급하려 애써오셨다. 현재"씨알의 소리"편집위원으로 계신다

* 저서로는『씨알 함석헌평전』『전쟁과 학교』가 있고, 공저로는『황국신민화교육과 초등학교제』외 다수가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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