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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26

[제1강]교육자 함석헌을 말한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05 09:10]에 발행한 글입니다. 교육자 함석헌을 말한다 1주제: 내 몸을 실험용으로 우리는 20세기 우리 학교사를 모르고 교육자 함석헌을 말하기 어렵다. 그의 일생이 일제 식민지와 해방과 분단과 내전을 무대로 삼고 있는 만큼, 그의 교육관도 한국역사의 뒷면을 이루는 우리 학교사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제로 자신의 자서전과 전집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학교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상가 함석헌은 그 학교교육을 부정한다. 그래서일까, 자신에게 교원자격증을 제공한 동경고등사범학교에 관한 부분은 “후회”라는 말로 간단히 줄이고 있다. 심지어 죽을 때 유언을 하라면 선생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면서, 항상 “모르.. 2020. 2. 7.
[제2강] 함석헌의 마지막 수업-조선역사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06 10: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조선역사’의 마지막 수업 오산학교교사는 함석헌의 유일한 학교경력 저명한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직후에 함석헌은 서울대학교 역사학 교수로 임용될 뻔 했다고 한다. 또 월남하기 직전에는 김일성대학에 취직하러 간다는 명분으로 혹시 모르는 시베리아 유형의 길을 벗어나기도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그는 서울대학교나 김일성대학교의 역사학 교수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제 때 오산고등보통학교 역사선생의 자취는 유일한 그의 학교선생 경력으로 알려져 있다. 즉 1928년 4월부터 1938년 3월까지 10년간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 학생들은 그가 자신의 뼈를 묻기로 한 그 학교를 왜 떠나야 했는지 더 잘 알.. 2020. 2. 7.
[제3강] 전쟁시대와 싸우던 교육자- 함석헌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07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전쟁시대와 싸우던 교육자- 함석헌 선생다운 선생-함석헌 함석헌은 스스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다녔다면서 “교육이야말로 하나님의 발길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발길질 때문에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역사선생으로 중간에 ‘마지막 수업’을 해야 했고, 해방 직후에는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으로 신의주학생사건 때문에 하루 아침에 사형수로 전락한 냉전이데올로기의 첫 희생자였다. 그리고 70대의 나이에도 충청남도 천안에서 ‘구화고등공민학교’를 맡아 새로운 교육사상과 교육과정을 운영한 바 있다. 요즘의 대안학교 형태였는데, 끝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함석헌은 학교현장에서 실패한 교육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 2020. 2. 7.
[제4강] 청소년 피를 빨아먹는 특권계급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08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교육자 함석헌을 말한다-4] “학교 뒤에는 청소년의 피를 빨아먹는 특권계급이 있다” 함석헌의 반자본주의 교육관 다음, 함석헌의 반자본주의 교육관은 여전히 새롭다. 이른바 사교육이란 거대한 괴물의 출현을 이미 50년 전에 예고한 것처럼 보인다. 그 동안 권력교체가 이루어지고, 역대 대통령들도 무척이나 교육개혁을 외우고 다녔지만,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적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학교체제와 교육풍토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모든 제도ㆍ표준이 자본주의 경제조직 위에 놓여 있다.……자본주의는 형식적으로 자유나 인격주의와 일치되는 것이므로 제도상으로는 계급도 없고 인격의 차.. 2020. 2. 7.
[제5강] 함석헌이 말하는 미래의 공교육 개념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09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교육자 함석헌을 말한다-5] 미래의 공교육 이념 교육자 함석헌의 삶과 사상 우리 학교교육의 나이는 100년이 훨씬 넘는다. 그러나 공교육의 개념이나 기준은 역사적으로 명확하지도 않다. 이런 형편에서 참교육자라면 학교현장에서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반대로 “교육을 직업으로 아는 가련한 인생”이라면 학교선생보다 더 좋은 직업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인생관은 곧 교육관이기도 하다. 함석헌의 교육관은 현대인의 인생관을 문제 삼는다. “자본주의요 공산주의요 하지만 그것은 아직 표면의 소리요, 문제는 깊은 데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문제는 인간의 본질, 존재의 성격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교육의 이념이 거기까지 깊어지지.. 2020. 2. 7.
[제6강] 과거로부터 온 비젼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0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교육자 함석헌을 말한다- 6] “과거로부터 온 비젼” 함석헌이 걸어간 교육자의 길 - 아무나 가지 않은 길 우리 교육의 미래는 함석헌이 걸어간 교육자의 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길은 그가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걸어간 참교육자의 길이요 “교육을 직업으로 아는 가련한 인생”들이 무리를 지어가던 속된 길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읊은 ‘풀이 더 있고 사람의 자취가 적어/아마 더 걸어야 될 길’처럼 아무나 “가지 않은 길”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조선총독부에 의해 ‘찍힌 선생’이 되고, 소련군에 의해 ‘사형수’가 되고, 이승만독재에 의해 ‘빨갱이’가 되고, 박정희독재에 의해 ‘정신분열증 늙은이’가 되고, 전두환.. 2020. 2. 7.
[제1강] 함석헌의 역사관을 말한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9 09:1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치석 선생님의 함석헌의 역사관을 말한다-1] 믿음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 함석헌의 역사서술은 전문가 입장인가. 함석헌의 역사저술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사상가 함석헌의 결정적인 기반이기도 하다. 본디 그 원형은 오산고등보통학교 역사선생 시절에 월간『성서조선』지(誌)를 통해서 1934년 2월부터 약 2년간 연재하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본래 이것은 나 홀로의 한숨이며 돌아봄이요, 알아주는 친구에게 하는 위로요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믿음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1) 과연 문학비평가 김현이 “역사서로보다는 차라리 수필로 읽어야 할 책”이라.. 2020. 2. 4.
[제2강] 함석헌- 역사교사가 된 것을 탄식하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0 09: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세계 제1의 조선역사 강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기운을 두려움으로써 감사한다 함석헌, '고난의 역사'에 대하여 강의를 시작하다.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먼저 그 잡지를 구독하는 ‘본지독자 동계성서강습회’에서 발표된다. 이 강습회에 참석하려면, 필히 양정고등보통학교 박물선생 김교신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함경도나 제주도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되돌아가야 할 정도로 엄격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 강습회 기간은 6박 7일인데, 언제나 연말연시에 진행된다. 함석헌의 조선역사 강의는 1933년 12월 31일에 시작해서 1934년 1월 3일에 끝난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 『성서조선』에 연재되고, 해.. 2020. 2. 4.
[제3강] 한국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1 09:15]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은 성서주의가 아니다 '조선역사'는 기독교 전파의 목적이 아니다. 함석헌은 한국역사의 기조(基調)를 고난이라고 확신한다. 마치 음악의 어떤 기본 음조(音調)와 같이 한국역사는 고난이 기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악기”가 내는 소리를 고난으로 나타낸다. 이 고난의 역사를 한국사학자 천관우는 「조선역사」를 “어떤 특정한 사관을 가지고 한국사를 일관되게 꿰뚫어 본 거의 유일한 역사책”이라고 평가한다.(1)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발견한 고난의 역사를 “전인미답”이요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받아들인다. 그 충격을 다스리는 물길트기가 ‘성서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 2020. 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