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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

[제1강] 함석헌의 역사관을 말한다.

by anarchopists 2020. 2.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19 09:1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치석 선생님의 함석헌의 역사관을 말한다-1]


믿음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

함석헌의 역사서술은 전문가 입장인가.

함석헌의 역사저술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사상가 함석헌의 결정적인 기반이기도 하다. 본디 그 원형은 오산고등보통학교 역사선생 시절에 월간『성서조선』지(誌)를 통해서 1934년 2월부터 약 2년간 연재하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본래 이것은 나 홀로의 한숨이며 돌아봄이요, 알아주는 친구에게 하는 위로요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믿음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1)

과연 문학비평가 김현이 “역사서로보다는 차라리 수필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한 것처럼, 한국사학계에서도 함석헌의 역사저술에 대해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예컨대 “학계의 원로부터 소장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성”된 40명의 학자들이 집필한 책에는 아예 함석헌의 이름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2) 그의 역사저술을 공식(?) 역사책으로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처음 함석헌의 한국역사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한국사학자 천관우도 그것을 전문적인 역사가의 저술로 보지 않는다.

“실례의 말이지만, 전문적인 역사가의 저술이 아닌 만큼, 사실(史實)을 다루는데 반드시 완전하다고 보는 것도 아니요, 더구나 기독교도가 아닌 나로서는 그 사관에 덮어놓고 따라가게 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술에는 국사의 다른 통사에서 느끼지 못하는 어떤 인력이 있다. 무미건조란 당치도 않다.”(3)

하지만 그는 나중에 반독재민주화운동 참여과정에서 함석헌이 “오늘 앞장서서 창조하고 계시는 역사는 앞으로 누군가에 의하여 기록될 중요한 부분”이라면서 그것은 “역사의식이 분명한 역사가, 역사서술 속에서 무언가 뭉클한 자신이 시대적 사명을 느끼도록 채찍질하는 역사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라고 말해서 앞서와 뉘앙스가 다소 다른 역사가 함석헌론을 말한 바 있다.(4)

물론 그의 견해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역사가든 아니든 이미 올해로 삶을 마감하진 20주년을 맞이하는 함석헌에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천관우에게서 “무언가 뭉클한” 것을 느끼게 한 ‘한국역사 이야기’의 관점과 서술은 지금까지 75년간 세대를 이어가며 수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말았던 한 청년교사가 심혈을 기울이던 ‘고난의 역사’이기도 하다.

함석헌, 우리나라 최초로 민족주의사학을 열었다.

그때 그는 그 “고난의 역사”라는 믿음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이런 경우는 일제 때 한국역사를 서술한 역사가나 역사학자에게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민족주의사학을 논하는 한국사학자가 단 몇 줄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민족을 개인과 마찬가지로 보고 그것이 역사의 하담자로 보는 관점에서 민족주의사학과 서로 통하는 것”(5)이라고 말하던 직후에도 박정희 유신체제의 군법회의에서 중형을 선고 받는다. 그때도 우리 역사교육은 이른바 식민사학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한 한국사학자에 의해 “식민지시대 민족주의사학이 가지고 있던 민족 갱생을 향한 치열한 의식과 맥이 통한다”라면서 역사가 함석헌을 “1930년대 한국사학사의 이해과정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인물”로 적극 평가한 것은 함석헌이 그 “고난의 역사” 현장에서 일생을 마감한지 10여년 후의 일이다.

“그가 조선사의 서술에 적용했던 발전이라는 개념은 역사적 유물주의가 가지고 있던 조선사의 발전이라는 개념과 함께 역사 이해의 수준을 한 단계 고양시켜 주었다. 그는 일관된 사관 위에서 조선의 통사를 서술했다.”(6)

그 사이에 역사가 함석헌을 가장 확실하게 부각시킨 분은 원로 서양사학자 노명식 교수라고 본다. 그가 전두환 군사독재 기간에 발표한 “토인비와 함석헌의 비교는 가능한가”(7)는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관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과 이해를 도모하는 최초의 학술논문이다. 그는 그 후에도 함석헌이 왜 역사가인가를 다른 한국사학자들과 비교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역사가로서 함석헌의 문장은 오늘과 내일의 한국역사학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한다. 역사서술은 객관성을 중시하는 만큼 그 표현은 어디까지나 문법적으로 정확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 표현이 난해하거나 생경해서는 안된다.”(8)

이 문제는 역사가 함석헌을 파악하는데 새로운 단서를 제공한다고 믿고 있다. 그의 문장과 문체에서 전문역사학자의 어떤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울러 조금 시야를 넓힌다면, 역사가 함석헌의 존재는 기존의 역사학자를 반박하는 연구풍토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지 모른다. 가령 생물학의 연구를 확장시킨 파스퇴르는 생물학자가 아니었으며, 누구보다도 역사연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에밀 뒤르켕은 사회학에서 출발한 철학자였다.

나아가 토인비의 문명론에 선구적 발자취를 남긴 다닐렙스키는 중등학교 생물학 교사였고, 헬레니즘 세계를 발견하고 역사발전의 나선형 모델을 제시한 드로이젠도 중등학교 역사선생이었다는 사실이다. 함석헌의 독자들도 그가 추구한 것은 역사적 진실이지, 역사가로서 평판을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것이다. (2009. 1.18, 이치석)

<참고문헌>
1. 함석헌,『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머리말, 1950.
2. 조동걸ㆍ한영우ㆍ박찬승 엮음,『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창작과 비평사, 1994.
3. 천관우, “내가 보는 한국사의 문제점들”, 『사상계(思想界)』1963년 2월호.
4. 천관우, “함선생의 한국사관”,『씨의 소리』1971년 12월호.
5. 이기백,『한사학의 방향』일조각, 1978.
6. 조 광, “함석헌의 역사철학과 한국사 이해”, 조광의 한국사홈페이지, 2000.
7. 노명식,『한국기독교의 존재 이유』한국기독교연구소, 1985.
8. 노명식, “한국의 역사가, 함석헌”,『한국사시민강좌』제26집, 일조각,
2000.
이치석 선생님은
함석헌의 역사관
* 이치석 선생님은, 프랑스 아미앙대학교 역사학 박사과정(D.E.A)수료하였으며, 함석헌의 "씨알교육"을 우리나라에 보급하려 애써오셨다. 현재"씨알의 소리"편집위원으로 계신다

* 저서로는『씨알 함석헌평전』『전쟁과 학교』가 있고, 공저로는『황국신민화교육과 초등학교제』외 다수가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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