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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

[제3강] 전쟁시대와 싸우던 교육자- 함석헌

by anarchopists 2020. 2. 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07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전쟁시대와 싸우던 교육자- 함석헌

선생다운 선생-함석헌

함석헌은 스스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다녔다면서 “교육이야말로 하나님의 발길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발길질 때문에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역사선생으로 중간에 ‘마지막 수업’을 해야 했고, 해방 직후에는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으로 신의주학생사건 때문에 하루 아침에 사형수로 전락한 냉전이데올로기의 첫 희생자였다.

그리고 70대의 나이에도 충청남도 천안에서 ‘구화고등공민학교’를 맡아 새로운 교육사상과 교육과정을 운영한 바 있다. 요즘의 대안학교 형태였는데, 끝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함석헌은 학교현장에서 실패한 교육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학교다운 학교, 선생다운 선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예컨대 처음에는 일제가 우민화(愚民化)를 추구하면서 학교교육은 식민지 동화정책에 협조적인 소수의 총독부 관료를 생산했고, 특히 해방 후에는 냉전이데올로기 아래서 대한민국을 “미국의 세계시장 영역에 편입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미군정의 교육정책이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 때 학교선생들은 ‘조선사람’을 일본사람으로 타자화하고, 하나의 민족을 이분법으로 적대시하던 교육자였다.

그리하여 획일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 학교체제의 내력이 불순한 만큼, 교장이나 장학사가 되었다고 반드시 성공한 교육자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른바 전쟁폭력의 세계화를 초래하던 시기에 우리의 학교교육이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에 치명적으로 전염되고 말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교육관-반국가주의


이런 형편에서 함석헌의 교육관은 생태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반국가주의의 기조를 이룬다. 먼저, 지난 20세기가 끝나기 10년 전까지, 함석헌의 일생과 거의 일치하는 기간에 인류는 전쟁의 세계화로 모두 1억 4천만 명의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서구열강의 국가주의가 초래한 재앙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당시에 모든 학교는 아이들에게 국가주의를 심는데 전력을 다한다.

국가주의는 기독교천국을 해체하고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국민국가(nation state)를 건설한 이래 전쟁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교육을 위해 모든 학교도 병영화하고 만다. 나아가 전쟁폭력을 주입하던 국민국가의 국민윤리와 국가주의가 지배하는 애국심은 아직도 학교현장에서 청산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함석헌은 서구열강의 국가주의가 초래한 전쟁을 “병적 현상”으로 진단하면서, 그 전쟁의 세계화를 “하나님의 빚 받음”이라고 규정한다. 흔히 “역사는 시대구분”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에게 현대란 “하나님의 편지가 쓰이는 종이 폭” 위에 “무시당한 생명의 원수 갚음”이 펼쳐진 전쟁시대를 말한다.

따라서 그의 교육관은 민족을 사랑하면서도 “이제 역사라면 세계역사 혹은 인류역사 혹은 생명의 역사 하나가 있을 뿐”이라면서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는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50년 전에 “아이들에게는 민족도 인종도 없다”라고 강조한 말은 최근에 유행하는 어떤 탈민족주의의 교육론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의 반국가주의는 역시 50년 전에 국가주의 교육을 상징하는 “국민학교”란 이름을 고쳐야 한다는 최초의 주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육민주화는 국가주의 청산이다.

“국민학교란 이름은 지난 날 일본이 전체주의의 독재정치를 민중 위에 씌우려 할 때 붙인 것이다. 거기는 국가지상주의ㆍ민족숭배사상이 들어 있다. 이제 자라나는 아이는 세계의 시민일 터인데, 그런 것을 붙여 인간성을 고의로 치우치게 하면 그것은 나아가는 역사 진행에 공연한 마찰만 일으키는 일이다.”
(“새 교육”,『함석헌전집 2권』)

그리고 1986년 5월 15일 흥사단 강당에서 현재의 전교조의 종자였던 민주교육실천협의회가 창립식을 열 때도, 그의 축사는 일관되게 반국가주의 교육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필자가 기억하는 그의 첫 마디는 아직도 생생하다.

“국민학교란 이름을 그대로 두고 어떻게 민족 민주교육을 말할 수 있느냐?”

요컨대, 국가주의 교육의 청산 없이 교육민주화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의 축사 10년 만에 소수의 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된 명칭개정운동의 결과로 무려 55년간 사용하던 이름을 “초등학교”로 고쳐졌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 아래서는 국가주의 교육지표인 국민교육헌장을 여야 만장일치로 제정했으며, 전교조는 “국민학교” 명칭개정에 대해 처음에는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제(日製) 국가주의 유물인 일제고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사 7명이 해직되었다. 그 만큼 국가주의 교육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전쟁시대와 싸우던 함석헌의 교육관이 현재도 ‘과거의 전망’으로 남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2009.1.6)

                                                                           
이치석 선생님은
함석헌의 역사관
* 이치석 선생님은, 프랑스 아미앙대학교 역사학 박사과정(D.E.A)수료하였으며, 함석헌의 "씨알교육"을 우리나라에 보급하려 애써오셨다. 현재"씨알의 소리"편집위원으로 계신다

* 저서로는『씨알 함석헌평전』『전쟁과 학교』가 있고, 공저로는『황국신민화교육과 초등학교제』외 다수가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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