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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26

[제4강] 함석헌의 역사학은 성서중심적이지 않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2 09:12]에 발행한 글입니다. 성서적 입장’과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함석헌의 사관은 성서적 입장이 아니다.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을 인구에 회자되는 송나라 때 동파거사(東坡居士) 소식(蘇軾)의 시에 비유한다. 그가 풀이한 것은 다음과 같다. 횡간성령측성봉(橫看成嶺側成峰/모로 보니 재, 옆에서 보니 봉우리) 처처간산각부동(處處看山各不同/곳곳마다 보는 산 서로서로 다름이) 부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여산의 참얼굴 알아볼 수 없기는) 지연신재차산중(只緣身在此山中/다만 내 몸 이 산 속에 있음이네) 두 번째 연은 원래 원근고저각부동(遠近高低各不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역사이해가 “관점이 변함을 따라 그 보이는 바가 각이(各異)하다”라는 점을 설명하기.. 2020. 2. 4.
[제5강] 수동적 우리에 대한 투쟁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3 08:10]에 발행한 글입니다. 수동적 우리’에 대한 투쟁 한국 사람은 진짜 우리다운 우리가 아니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다양한 역사인식을 낳는다. 특히 ‘고난의 역사’는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인데, 학계의 관심사처럼 그것은 한국역사에서 외세개입과 만주상실에 관련되어 있다. 그 지리적 조건은 대륙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적 위치와 지세(地勢)이기도 하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한반도 세 면에서 다가드는 세 세력에 두루 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서쪽의 중국과 북쪽의 만주와 동쪽의 일본이다. 이 위치는 다이나마이트 같이 능동적인 힘을 가지는 자가 서면 뒤흔드는 중심이요, 호령하는 사령탑이요, 다스리는 서울일 수가 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가.. 2020. 2. 4.
[제6강] 함석헌- 인간이해의 새 지평을 열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4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인간 이해에 대한 무한한 지평을 열다. 함석헌은 역사가들의 역사에 대해서 불신을 드러낸다. 그들은 기껏해야 “역사를 쓰려다가 죽은 뼈다귀의 이름만을 적어 놓고” 말았다고 개탄한다. 마치 존경받지 못하는 사회 지도층이나 기득권층의 행동처럼 그들의 역사학 방법을 특권의식의 하나로 본다. 예컨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는 학교에서 배우는 통일신라시대라는 명칭이나 서술 자체가 아예 없다. 또 고려시대는 “고려의 다하지 못한 책임”으로, 조선시대는 “수난의 5백년”으로 쓰고 있다. 우리에게 낯익은 시대구분이나 통념을 부정한다. 나아가 고난의 역사를 자초한 ‘수동적 우리’는 삼국시대의 비극적 종말 이후 현재까지를 자아상실의 시대로 묶.. 2020. 2. 4.
[제1강]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머리말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6 14:29]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를 중심으로 Ⅰ. 머리글 - 함석헌이 역사가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함석헌(1901~1989)은 20세기 한국의 행동하는 지성과 시대적 양심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씨알’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걸은 분이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족적을 남겼다. 그는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교육을 하려다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 되고 사상가도 못 되고 …” 983년 “함석헌전집” 편찬 시 편찬위원 일동 명의로 된 간행사에서는.. 2020. 2. 4.
[제2강]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1930년대 한국사학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7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Ⅱ. 1930년대의 한국사학 1930년대 민족주의 사학과 사회경제사학 1930년대는 일제의 만주침략(1931)과 이후 15년 동안 계속된 침략전쟁의 수행, 신사참배와 황국신민화 강요, 국가총동원법(1938) 이후 각종 수탈 등 파쇼적 지배체제가 강화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1920년대 이래의 소작인,노동자 투쟁이 본격화 되었고, 공산주의운동도 더욱 확산되어 민족 내부에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문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일제의 강권통치는 더욱 기승을 부렸으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역사연구를 부단히 진행하였다. 1930년대의 한국사 연구는 신채호(申采浩)의 투옥(1928)과 순국(1936) 이후 국외에서의.. 2020. 2. 4.
[제3강] 함석헌의 역사서술-성서적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8 08:20]에 발행한 글입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저술과 수정 “조선역사”는 김교신이 주필로 있던 《聖書朝鮮》의 1934년 2월호(제61호)부터 1935년 12월호(제83호)까지 2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조선역사”는 동경고등사범학교 文科 一部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1928년 귀국하여 모교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함석헌이 ‘약혼 받은 거러지 같은 심정’이었으나, ‘세 가지 작대기 같은 생각’(믿자는 의지, 나라에 대한 사랑, 과학적이려는 양심)으로 저술한 것이다. 당초 “조선역사”는 그가 성서조선 겨울집회에서 1주일 동안 ‘겨울날 문을 닫은 골방 안에서 여남은 되는 믿음의 동지들과 무릎을 걷고 앉거나 머리를 맞대고 기도로서 한 이야기.. 2020. 2. 4.
[제4강] 함석헌의 역사인식- 당시 사학계의 평가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9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당시 한국사학계에 대한 평가 함석헌은 자신이 “조선역사”를 연재할 당시의 한국사학계를 ‘사학계라 할 것도 없다’고 평가한 바 있다.1) 그는 “조선역사”가 사학계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고 겸양하였으나, “조선역사”가 해방될 때까지 10년 동안 ‘역사를 쓰는 이들로부터 묵살’당한데 대한 섭섭한 감정도 드러냈으나, 성서조선사건으로 피체되었을 때의 일화를 들며 결국 고난의 역사가 승리한 것이라고 자평하였다. 그는 당시의 학풍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하고 있었다. 우선 그는 우리 역사에서 영웅과 찬란한 문화를 통해 민중의 분발을 촉구하고자 한 민족주의사학의 ‘영휘(榮輝) 있는 조국의 역사’ 교육을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는 할 수 없.. 2020. 2. 4.
[제5강] 함석헌의 한국사 인식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31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역사 발전 단계와 한국사 전개의 인식 함석헌은 한국사의 역사발전단계를 4단계로 구분하였다. 함석헌는 역사를 수레바퀴나 나선운동과 같이 제 자리를 돈 것 같으나 실제는 앞으로 나아간 것이라는 발전사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1) 그리고 역사를 사람의 일생(출생, 성장, 장년, 노년)에 빗대어 발생기, 성장기, 단련기, 완성기로 나누어 발전 단계를 이해하였다. 그의 역사발전 4단계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발생기) : 인류의 출현에 대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며,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7천년 경에 이르러 상당한 문화의 지역에 들어섰으며 석기시대 이전까지가 발생시기이다. 동굴 거주 인류의 유물을 .. 2020. 2. 4.
[이치석 제1강] 함석헌을 왜 공교육을 혁명가로 보는가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3/10 09:36]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서거 20주기, 간디서거61주기 추모학술모임 강연내용-이치석] 어머니의 목걸이 찾기 -함석헌을 왜 공교육 혁명가로 보는가?- 어머니의 목걸이 찾기 솔직히 처음에 준비한 제목은 “국가주의와 싸우는 함석헌의 공교육 이념”이고, 그 내용은 「고난과 교육」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삼웅 선생님께서 마침 “독재정부와 싸우는 함석헌의 저항정신”이라는 원고를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우연히 두 사람의 제목이 “○○○○와 싸우는 ○○○의 ○○○”으로 비슷한 걸 알아채고 중간에 다소 오락가락 고민하다가 결국 “함석헌을 왜 공교육 혁명가로 보는가?”라는 제목과 내용으로 모두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서 부랴부랴 써놓고 나서 읽어보.. 2020. 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