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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

[제2강] 함석헌- 역사교사가 된 것을 탄식하다

by anarchopists 2020. 2.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0 09: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세계 제1의
조선역사 강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기운을
두려움으로써 감사한다

함석헌, '고난의 역사'에 대하여 강의를 시작하다.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먼저 그 잡지를 구독하는 ‘본지독자 동계성서강습회’에서 발표된다. 이 강습회에 참석하려면, 필히 양정고등보통학교 박물선생 김교신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함경도나 제주도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되돌아가야 할 정도로 엄격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

강습회 기간은 6박 7일인데, 언제나 연말연시에 진행된다. 함석헌의 조선역사 강의는 1933년 12월 31일에 시작해서 1934년 1월 3일에 끝난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 『성서조선』에 연재되고, 해방 후에 단행본으로 엮어진 다음, 다시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지금도 새로운 독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당시에 모두 4일간 이루어진 조선역사의 첫날 강의는 역사이해, 사관과 성서적 사관, 세계사의 윤곽, 조선사람 등이다. 그 감동을 친구 김교신은 이렇게 전한다.

“만 세 시간을 쉬지 않고 했으나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일순간을 보낸 것처럼 지나갔다.”

둘째 날은 정월 초하루였는데 오후 7시부터 밤늦게까지 고조선시대부터 고구려 멸망까지, 셋째 날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직후까지, 그리고 넷째 날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시대의 결론으로 ‘고난의 역사’를 짊어진 조선사람의 특징인 ‘인(仁)’이 세계역사에 기여하게 될 것으로 마무리한다. 나중에 『성서조선』에 실린 조선역사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사람과 천사와 세계의 관광거리가 되었다. 아니다. 세계사의 하수구가 되었다. 그러니 세계사람들이여, 이 하수구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열락의 궁전에서 즐기게 하는 것은 이 하수구가 아닌가.……그대들의 모든 죄악의 증거물들을 고맙게 감추어 주는 것이 이 하수구가 아닌가.……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두뇌를 길러주는 곡물과 야채를 만들어 내는 것까지 이 하수구가 아닌가.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

모든 강의가 끝난 후에 김교신은 자신의 일기에 “세계 제1의 조선역사 강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기운(奇運)을 두려움으로써 감사하다”라고 적었다. 그가 그토록 감격한 까닭은 “보통학교 때부터 20년간 학교교육을 받았는데, 단 한 시간도 조선역사를 배울 수 없었던 신세”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신세는 김교신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모든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그런데 필자는 그 조선역사 강의를 오산고등보통학교 역사수업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즉 ‘고난의 역사’란 역사선생 함석헌의 역사인식이 민족적 양심과 더불어 겨울철성서모임에서 새삼스럽게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글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조선총독부가 금지한 조선역사 수업 때문에 스스로 무척이나 고민하던 점을 그대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왜 역사교사가 되었던고

“나는 6, 7년 이래 중등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어떻게 하면 그 젊은 가슴에게 광영있는 역사를 파악시킬까 하고 노력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용하였다. 어렸을 때 듣던 모양으로 을지문덕, 강감찬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려 힘썼으나 그것으로써 묻어 버리기에는 조선역사 전체에서 발하는 신음의 소리는 너무도 컸다. 남들이 하는 모양으로 생생자, 구선(龜船), 석굴암, 다보탑을 총출동시켜서 관병식을 거행해 보려 하였으나 그것으로써 숨겨버리기에는 속에 있는 남루(襤褸)가 너무도 심했다. 드디어 나는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는 유행식의 영휘있는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이 사실은 이 참담한 사실, 이것을 희망과 자부심에 작약하는 젊은 혼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생각할 때 나는 ‘왜 역사교사가 되었던고’ 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끓는 물을 돋아나는 싹 위에 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절망은 계속된다. 짐작컨대, 그 2년 전에 이미 함석헌은 “루비콘강을 건넜다”라면서 ‘고난의 역사’를 탄생시키기 위한 열정과 진통을 계속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책상 앞에서 역사가 함석헌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는 것과 달리, 그때 역사선생 함석헌은 식민지 교육현장에서 절망 끝에 ‘고난의 역사’를 낳는 진통을 계속했던 셈이다. 그러나 비관주의에 젖지는 않는다.

“크리스천은 사회의 하수구에 서 있어 그리로 흘러오는 하잘 것 없는 자들을 처분하는 것이 본직인가 합니다. 빛나는 이상이 꺼지는 것, 그것은 젊은 가슴에는 견딜 수 없는 일이지만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어느 덧 그 시간은 멀리 달아나버렸고, 그가 직면했던 역사풍경들도 현재 우리 곁에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고난의 역사’라는 한 구절 뿐이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실제로 고난 자체와 결투를 벌이던 그의 한 가닥 양심도 학문적 권위주의 때문에 시장에 돌아다니는 상품처럼 하나의 도구나 관념으로 격하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함석헌을 위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조선역사를 서술하던 그의 ‘성서적 입장’이 성서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본다. 또한 그것은 절망적인 현실을 극복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역사가의 전략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략 때문에 그의 「조선역사」서술은 애초부터 기독교의 성서주의로부터 일정하게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이치석 선생님은
함석헌의 역사관
* 이치석 선생님은, 프랑스 아미앙대학교 역사학 박사과정(D.E.A)수료하였으며, 함석헌의 "씨알교육"을 우리나라에 보급하려 애써오셨다. 현재"씨알의 소리"편집위원으로 계신다

* 저서로는『씨알 함석헌평전』『전쟁과 학교』가 있고, 공저로는『황국신민화교육과 초등학교제』외 다수가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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