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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38

그리스도인의 예감, 거룩한 보편사제 그리스도인의 예감, 거룩한 보편사제 돌은 이미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예감(Vorahnung, Vorgefühl)은 아직 실체가 없지만, 미리 추측하고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합리적인 구원에 대한 예감은 순수함, 곧 교활하거나 간교함이 없는(sine dolo) 갓난아이(geni infantes)와 같은 상태일 때 주어진다는 것은 신앙상식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잔꾀와 간교함은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salutem). 하지만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많은 종교인은 속임수와 간교와 간계로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아무리 인간의 생존경쟁을 위한 심리적 기제라고 하더라도 종교에서조차 그러한 현상이 목도 된다면 종교인으로서 살아갈 가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2020. 5. 10.
신앙의 대략난감 신앙의 대략난감 신앙은 받아들임입니다! “외부적인 숙명은 없다. 그 대신 내부적인 숙명이 있다. 사람이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속수무책임을 아는 순간이 오는 법이다. 그때에 갖가지 실수가 마치 현기증처럼 사람을 끌어당기기 마련이다.” 생텍쥐페리(Saint-Exupery)의 『야간비행』이라는 문학작품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해하고 싶어도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일들을 보면 억울하고 복장이 터지는 것을 감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태를 용납하기가 쉽지 않더라도 그것을 신앙으로 잘 받는 것도 복입니다. 신앙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온갖 학문적인 이론으로 풀어보려고 하지만 풀어볼수록 미궁에 빠질 때는 그.. 2020. 5. 4.
신앙이 피곤할 때(languor; fatigatio) 신앙이 피곤할 때(languor; fatigatio) 신앙은 해방입니다! “인격을 수양하지 못하는 것(덕을 닦지 못함),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는 것, 옳은 일(의로움)을 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다”(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 3장). 공자의 말입니다. 이처럼 신앙도 말이 아니라 수양이고 행동입니다. 덕행을 닦고 옳지 않음(不善)을 피하는 것이 신앙인의 행위(opus), 신심 행위(opera pia)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고 따르고(Patrem invocatis) 하는 모든 행위에는 부르는 자의 몫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자신을 어떤 호칭으로 부르도록 했다는 것 또한 스스로 그러한 위치에.. 2020. 4. 27.
시들지 않는 구원이여 시들지 않는 구원이여 믿음이 있는 사람은 희망을 봅니다! 사람들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자그마한 희망(spas, spem)이라도 찾으려고 합니다. 희망에 작은 것과 큰 것을 나눈다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희망은 상대적입니다. 절망적인 죽음의 상황에서 보면 작은 것도 큰 희망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희망을 품으면서 그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상적으로 보이는 것만이 희망의 실체인 것처럼 믿어버립니다. 희망이 갖는 의미와 그 영원성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시적인 나의 절망적 상황만을 타개한다면 희망의 구실을 다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희망은 어떤 최초의 존재가 그의 모범에 따라서 주는 결과로서 많은.. 2020. 4. 20.
고통 없이 고통을 맞설 수 없는 삶(필립 2,5-11) 고통 없이 고통을 맞설 수 없는 삶(필립 2,5-11) 구원은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마치 어느 특정인의 고통과 죽음으로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은 듯이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칫 죄책의 짐을 한 사람에게 지우고 다른 나머지 인류는 거저 받은 구원을 누리기만 되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로렌스(D. H. Lawrence)의 이라는 긴 시를 보면 좀 더 우리의 공통의 책임적 구원의 고통을 알 수가 있을 듯합니다. “작은 시냇물/ 황혼 빛으로 흐르고/ 푸르스름한 하늘이/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 풍경/ 이것은 거의 황홀의 경지/ 다들 잠자리에 든 시간/ 모든 말썽과 근심과 고통이/ 황혼 아래로 사라져 버렸네/ 이젠 황혼과 시냇물의/ 부드러운 흐름뿐/ 시냇물.. 2020. 4. 6.
하느님이 하고픈 말(로마 8,6-11) 하느님이 하고픈 말(로마 8,6-11) 하느님이 하고 싶은 말과 인간이 하고 싶은 말은 다릅니다! 멀리서 초월자의 목소리가 아롱아롱 들리는 듯하다가도 내 몸(carnis, 육체)과 세계를 보면 온통 욕심과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몸은 밥을 달라하고 잠을 달라하고 사랑을 달라하고 옷을 달라하고 얼굴을 치장해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몸을 갖고 있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지나치면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몸만 돌보려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동물도 식물도 함께 더불어 공존하려고 내 곁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인간인 나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욕망입니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 Heine)는 에서 참 아름다운 시어들을 늘어놓습니다. “새벽녘 숲에서 꺾은 제비꽃/ 이른 아침 그대에게 보내 드리리/ 황혼.. 2020. 3. 30.
함석헌의 언어이성비판과 감성사회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8/12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언어이성비판과 감성사회 이른바 포스트모던이라는 어떤 현상-이 현상은 규정하기가 애매모호함이 있지만-여하튼 우리 사회는 그런 시대를 접어들면서 미 즉 아름다움이라는 감성적, 감각적 삶이 급격하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계몽적인 사회에 대한 경험조차도 없는 한국사회는 서구의 사조나 문화를 수용하기에 바빴고 그에 따른 반성이나 성찰이 없이 사회 이곳저곳에서는 ‘미학’이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의 허영심을 자극하였습니다. 심지어 피부관리를 하는 곳에서도 간판은 ‘에스테틱’(aesthetic)이라는 수준 높은(?) 상호명을 붙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미학이나 감성주의를 운운하면서 정.. 2020. 1. 12.
[오늘의 명상] 씨알의 인간학 - 심미적 인간, 아름다운 맘을 찾습니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9/09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씨알의 인간학4 심미적 인간, 아름다운 맘을 찾습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아름다움이란 신의 유출(流出)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완벽한 미는 신에게만 있다고 보고, 모든 아름다운 존재는 절대자의 반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의 개념은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미학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칸트 같은 철학자도 미의 본질을 묻는 대신에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었습니다. 심지어 마르셀 뒤샹(M. Duchamp) 같은 작가는 일상적 오브제(objet)인 화장실의 ‘변기’를 가지고 ‘fountain’(샘)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내놓음으로써 일대 예술사의 전환기를 가져왔습니다. 그.. 2020. 1. 11.
[오늘의 명상]씨알의 인간학 - 생태적 인간, 자연은 우리의 어머님입니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9/10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씨알의 인간학5 생태적 인간,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사람들은 녹색을 좋아합니다. 녹색의 안정감, 생명력, 푸르름 등이 주는 정서적, 심리적 요인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대자연의 색깔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아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온난화 현상이나 경제적 가치를 우선으로 생각하며 석유에 의존하는 우리의 생산과 소비적 삶,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사업 등을 놓고 볼 때 녹색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녹색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이 말하기를 “사람들.. 2020.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