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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그리스도인의 예감, 거룩한 보편사제

by anarchopists 2020. 5. 10.

그리스도인의 예감, 거룩한 보편사제

 

돌은 이미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예감(Vorahnung, Vorgefühl)은 아직 실체가 없지만, 미리 추측하고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합리적인 구원에 대한 예감은 순수함, 곧 교활하거나 간교함이 없는(sine dolo) 갓난아이(geni infantes)와 같은 상태일 때 주어진다는 것은 신앙상식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잔꾀와 간교함은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salutem). 하지만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많은 종교인은 속임수와 간교와 간계로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아무리 인간의 생존경쟁을 위한 심리적 기제라고 하더라도 종교에서조차 그러한 현상이 목도 된다면 종교인으로서 살아갈 가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어떤 예감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郞)의 『일식(日蝕)』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날의 생활에서 인간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 속에서 투쟁하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존재, 곧 육체와 정신에 현현한 존재 그 자체는 순수현실태를 접함으로써 질료는 형상(idea; eidos; forma)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돌이라는 질료(materia)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의해서, 자기 안에 있는 본질의 승화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상태, 주님과 가까이 있는 상태 그 운동을 무한히 반복하지 않고서는 성취될 수 없는 성스러운 돌로서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다듬어지지 않은 돌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과 같은 순수한 존재와 같이 살아가면 그리스도를 닮은 형상으로 변화가 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변화된 그리스도의 모습, 곧 신령하고 순수한 돌(형상)을 보고서 또 다른 구원의 예감을 갖게 됩니다.

예감은 기적을 바라기도 하고, 어떤 대단한 행복과 희망을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영원으로 예감되고 영혼과 육체가 온전히 합일되는 상태의 그 존재변화는 무한히 하느님에게로 소급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으면 안 됩니다. 돌은 단순한 원소나 무생명(혹은 무기화합물)이 아닙니다. 무한한 생명을 암시하는 생명적 예감입니다. 무심코 버렸던 돌이 세월이 흘러 흙이 되고 그곳에서 수많은 생명이 움터 나오듯이, 그것은 살아있는 돌(lapides vivi)입니다. 예수는 모두가 버린 돌처럼 보였지만 하느님 앞에서는(coram Deo) 선택받은(electum) 생명의 돌이 되었습니다.

“매화는 본디부터 환히 밝은데/ 달빛이 휘영청 물방울 같네/ 눈서리에 흰 살결은 더욱 예쁘고/ 맑고 찬 기운은 뼈에 스민다/ 매화를 마주 보며 마음 씻나니/ 오늘 밤엔 찌꺼기 한 점 없겠지”(梅花本瑩然/ 暎月疑成水/ 霜雪助素艶/ 淸寒撤人髓/ 對此洗靈臺/ 今宵無點滓).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매화시입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매화의 은근한 향기, 군자적 자태, 고고하고 청한한 자태를 선비에다 비유하곤 했습니다. 매화를 본 율곡 이이가 한 점의 때가 끼지 않은 순결하고 고결한 마음 밭을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하느님 앞에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생명적인 돌로 살아가야 합니다. 왜 우리는 본래부터 밝았던 그리스도의 형상, 하느님의 모상(imago)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 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인자하고 온화한 맛을 본 사람들입니다(si gustastis quoniam dulcis Dominus). 매화와 같은 주님의 단맛(gusto)을 본 사람들이 자신 안에 있는 형상을 깨닫지 못하고, 자꾸 죽음의 돌로 살아간다는 것은 애초에 스스로 하느님에 의해서 형성된 질료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구원을 맛본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자태가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순수하고 성스러운 존재로서 변화될 질료, 즉 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제한하거나(angusto)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근처에, 주님의 부근으로(ad) 나아가야(accedo) 합니다(Ad quem accedentes).

 

그리스도인은 모두 사제들(sacerdotium)입니다!

 

종교에서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만이 성직자요 사제들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례를 집전하는 데 전문가적인 집단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래로 그래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다음과 같이 달리 말합니다.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in sacerdotium sanctum offerre spiritales hostias acceptabiles Deo per Iesum Christum).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거룩한 사제입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희생물(제병, hostia)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한 자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특정한 의례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양, 그러한 사람들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사제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이고 정신적인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공자는 “성인을 내가 만나볼 수 없다면, 군자라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子曰 聖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君子者 斯可矣)고 말하면서 “선한 사람을 내가 만나볼 수 없다면, 한결같은 사람이라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없으면서도 있는 체하고, 비었으면서도 가득 찬 체하며, 곤궁하면서도 부유한 체를 하는 세상이니, 한결같은 마음을 지니고 살기도 어려운 일이다”(子曰 善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有恒者 斯可矣 亡而爲有 虛而爲盈 約而爲泰 難乎有恒矣. <述而>, 25장)라고 탄식했습니다. 공자의 말처럼 사람이 한결같이(gleich; ernst) 산다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어떠한 일에도 차별을 두지 않는 마음, 구별이 없는 마음(unterschiedslos)으로 사람을 대하고 집단을 운영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만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별이나 구분이 없어야 합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위선적이지 않은 마음으로, 가식적이지 않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군자나 성인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와 같은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한결같은 마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흠과 결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살아가면서 수만 가지의 마음결로 나뉘고 구분을 짓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다시 『일식』에 나오는 글귀를 언급해보겠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인간이 행하는 바 어떤 결과가 오직 한 가지의 원인에 반드시 귀착된다고 하는 단순한 낙관주의를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결과가 나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미묘한 카오스(혼돈)에 의한 것이며,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찾아낸 원인이라는 것은, 유기적인 카오스로부터 조금 떼어온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물론 그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따라서 거기에 그리스도의 숨결로 진정한 성도 혹은 신자로서 한결같은 신앙을 견지하지 못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버려진 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서는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Vos autem genus electum, regale sacerdotium, gens sancta, populus in acquisitionem)라고 말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한결같다는 것이 성스러움과 거룩함을 나타내는 종교인의 지표가 된다면, 그것은 다시 거룩한 사제가 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배우고 실천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자처럼 말입니다. “성인(聖人)과 인인(仁人)이야 내가 어찌 감히 되겠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성인과 인인의 도리를 배우고 본받는 데 싫증내지 않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있다”(子曰 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述而>, 33장).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도 말씀을 믿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으면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qui offendunt verbo non credentes). 그리스도인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친히 대제사장으로서의 본을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해야 하고, 그의 삶을 본받는 것 이외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대저 말[言語]이라는 것이 이성의 채찍질에 의해 단련된 근육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면 …….”『일식』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말처럼, 다음의 성서의 말(ratio)은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심장이자 근육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qui aliquando non populus, nunc autem populus Dei; qui non consecuti(뒤따르다, consecutio) misericordiam, nunc autem misericordiam consecuti].

(1베드 2,2-10)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청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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