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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신앙이 피곤할 때(languor; fatigatio)

by anarchopists 2020. 4. 27.

신앙이 피곤할 때(languor; fatigatio)

 

신앙은 해방입니다!

 

“인격을 수양하지 못하는 것(덕을 닦지 못함),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는 것, 옳은 일(의로움)을 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다”(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述而>, 3장). 공자의 말입니다. 이처럼 신앙도 말이 아니라 수양이고 행동입니다. 덕행을 닦고 옳지 않음(不善)을 피하는 것이 신앙인의 행위(opus), 신심 행위(opera pia)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고 따르고(Patrem invocatis) 하는 모든 행위에는 부르는 자의 몫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자신을 어떤 호칭으로 부르도록 했다는 것 또한 스스로 그러한 위치에 걸맞은 존재여야 하는 게 마땅한 일입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해주었다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품고 책임이라는 몫을 감당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하느님에 관해서는 인간이 왈가왈부할 수 없으니, 다만 인간의 편에서 생각을 해보면 무한한 신이 그러한 호칭으로서 사람의 인격을 가진 유한한 존재로 자신을 노출했다는 것은 은총의 표지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느님 또한 인간을 자식으로 부를 수 있도록 다리를 놓은 존재가 그리스도입니다.

그 부름, 곧 인간이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신이 인간을 자식으로 초대한 것은 다름 아닌 해방(redempti)입니다. 헛된 삶(vana; 내용이 빈, 쓸데없는, 공허한)을 깨닫게 하고 진정한 삶을 살도록 만든 것이 구원이자 해방입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어떻게 신앙적 행위를 통해서 신앙인으로서의 몫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에게 맡겨져 있는 신앙적 행위는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 주신 사랑에 대한 반응이자 응답(responsum)입니다. 신에게만 현재의 상황에 대한 책임(responsabilitas)을 묻는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요구사항만 따지는 어린 아이와 같은 행위입니다. 성장은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몫을 당당하게 지고 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 신앙은 그와 같은 신자로서의 몫을 어떻게 행위로 나타낼 것이냐에 중요한 방점이 있습니다.

공자가 덕을 닦고 의로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맘에 걸리고 두렵다고 한 것은 바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신자로서의 삶이든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삶이든 모두가 나그네로서의 삶(temporarius)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시간 동안(tempore) 가능한 한 인간다운 삶의 태도, 사람다운 생활방식(conversatione)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열 갈래나 되는 마음을 하나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집중하고, 임시적이고 단편적인 삶을 온갖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삶으로 소진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세속적인 아버지의 삶의 행위가 아니라 신과 같은 존재에 부합하는 초월적인 삶을 살라는 명령과도 같습니다. 인간의 삶을 행위(opus)로 공정하게 판단하겠다는 신의 의지는 곧 인간이 아버지로서의 신의 의지에 준해서 살았는가를 살피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유한한 시공간 안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이 정말 임시적인 삶처럼 대충 사는 삶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배운 대로 신앙의 덕을 갈고 닦아서 신의 마음에 쏙 들 수 있는 신앙적 행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은 가볍거나 경거망동한 것이 아니라 두렵습니다(timore). 하늘처럼 무겁고 진중한 삶이 아니라 부엽(腐葉/ 浮葉)처럼 되어버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성취된 인간의 해방은 하늘이 인간의 마음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하늘이 인간에게 본래적인 마음을 다시 부여해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라고 다시 생각하고 판단한 것입니다(re-deem; re-deman).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회복시켜준 그 도움은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의 큰 도움 혹은 구원(Hilfe)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방된 인간은 자신의 생명적 삶을 재고해 준 신의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고 삶의 부패를 막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도와달라고 외치는 소리(Hilferuf)에 응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의 소리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인간을 해방시킨 사건은 한 사람의 죽음을 희생양으로만 삼자고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가녀린 어린 양(Agni)의 피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희망의 대상(spes)으로 동시에 조바심과 두려움(spes)의 존재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희망하는 만큼 그 희망의 존재는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삶의 행위에 대해 하느님이 의로운 판단을 내리실 때, 그 마음에 흡족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행위가 되도록 하십시오!

 

인간의 삶의 덕행이나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한 잣대는 하느님의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삶의 지침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지침대로 살지 못할 때 어두운 심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복종하고 마음이 깨끗해져야 합니다(Animas vestras castificantes in oboedientia veritatis). 진리에 순종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fraternitatis amorem). 그것도 거짓 없이(non fictum) 말입니다. 결국 사랑의 행위가 제일입니다. 인간은 서로 진심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ex corde invicem diligite attentius). 형제자매를 사랑할 때는 지체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곧 진리에 귀 기울이게 되면 하늘의 마음이 느껴지게 됩니다. 하늘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인간의 본성 안에 들어와서 깨닫게 되면 사람이 서로(invicem)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마음은 인간이 더럽고 추한 마음을 버리고 오직 정신을 차리고(attentio) 서로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자신의 기원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와 다릅니다. 이성과 감성을 지니고 있고 신을 찾을 수 있는 영성이 있는 존재자입니다. 다만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존재자가 될 때 인간일 수 있습니다.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사는 사람은 그저 ‘생각하지 않는 동물’일 뿐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서로 사랑을 추구할 리 만무합니다. 자신이 새로 난 사람(renai; renatus), 다시 하늘이 부여 해 준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지닌 존재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본성이 하늘과 같다는 것을 재삼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꺼려합니다. 아니 하늘의 진리가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파생된 말에 현혹이 됩니다. 진리는 자신의 본성이 하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하늘을 생각하도록 하고, 자신의 본래적인 순수한 마음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진리는 씨앗(semine; semen)이 다릅니다. 사람의 거짓된 마음, 인위적인 마음에서 흘러나온 말은 부패하게 하고 타락하게 하여 가멸적(可滅的)인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기원한 진리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 vivum et permanens)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은 하늘의 진리에 의해서 다시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이것을 소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의 마음은 인간이 늘 그 마음 밭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본성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닮으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귀 기울임과 순수한 마음을 품음, 그리고 서로 사랑. 이것이 신앙적 행위의 근본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1베드 1,17-23)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청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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