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신앙의 대략난감

by anarchopists 2020. 5. 4.

 

신앙의 대략난감

 

신앙은 받아들임입니다!

 

“외부적인 숙명은 없다. 그 대신 내부적인 숙명이 있다. 사람이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속수무책임을 아는 순간이 오는 법이다. 그때에 갖가지 실수가 마치 현기증처럼 사람을 끌어당기기 마련이다.” 생텍쥐페리(Saint-Exupery)의 『야간비행』이라는 문학작품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해하고 싶어도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일들을 보면 억울하고 복장이 터지는 것을 감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태를 용납하기가 쉽지 않더라도 그것을 신앙으로 잘 받는 것도 복입니다. 신앙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온갖 학문적인 이론으로 풀어보려고 하지만 풀어볼수록 미궁에 빠질 때는 그냥 그 사태를 내 삶으로 받는 자세가 신앙입니다. 받아-들임의 신앙은 이해불가의 사태를 받고 내 안에서 그 사태를 녹여내려고 하다보면 바로 그것이 피해야 것이 아니라 나의 사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타자의 억울함, 타자의 고통, 타자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억울함, 나의 고통, 나의 죽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곳에서 누구의 님이 아니라 나의 님, 곧 하느님을 만납니다. 사태를 받아서 내 몸과 의식으로 들이려는 순간 신앙감각은 바로 곁에 맞닿아 있는 하느님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신앙감각이 사태를 느끼려고 할 때, 고통, 억울함, 아픔, 죽음 안에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K. Jaspers)는 그와 같은 사태를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는 개념으로 적시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는 것은 실존적 경험의 당연한 극한의 깊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의 몸과 이성은 하느님이 바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propter conscientiam Dei). 받아-들임은 그렇게 한계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존재가 바로 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고, 그 속에서도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인간의 몸과 이성은 결코 인생을 맞볼 수 없습니다. 늘 거부하기만 하고 핑계대기만 합니다. 나의 고통, 아픔, 죽음과 나란히, 곁에(propter) 초월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 그것이 신앙감각이요 나아가 신앙인식입니다. 오죽하면 시인 디킨슨(Emily E. Dickinson)도 이런 노래를 하였을까요?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라/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 주거나/ 한 괴로움을 달래 주거나/ 또는 힘겨워하는 한 마리의 로빈새를 도와서/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 내 삶은 정녕 헛되지 않으리라”(<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타자의 고통과 괴로움, 억울함, 그 힘겨운 삶을 극복하도록 해 주고 싶어하는 시인의 마음은 인간이라면 갖게 되는 공감(empathy), 혹은 양심(conscientiam; conscientia)이라고 불리는 신의 감성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자는 고사하고 자신이 처한 한계상황조차도 거절할 수 없는 절망적 사태라는 것을 잘 압니다. 신앙은 애환이고 애절함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만일 도와주고 달래 주고 덜어 주고자’ 하는 그 애절함, 간절함을 갖는 자기연민과도 같은 신앙감정은 한계상황의 사태를 먼저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이 자기연민조차도 없으니 타자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여유가 없습니다. 사태를 관조적으로 느끼고 인식하려면 자기의 한계상황 바로 그 안에, 가장 근저에(propter)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신앙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 하느님!’ 이 각성의 외마디가 바로 신앙의 아름다움, 신앙의 은총[Haec(hic) est enim(사실, 과연, 틀림없이) gratia]입니다. 이해불가의 사태가 존재인식을 하게 됨으로써, 그 사태가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해가 됩니다. 사태가 고통, 죽음, 괴로움, 수치라고 하더라도 시선이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옮겨가는 것이 바로 신앙 혹은 신앙의 미학입니다. 물론 신앙이 있더라도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애가 탑니다. 애가 탄다는 것은 너무 근심스럽고 안타까워서 창자가 타는 것처럼 마음이 죄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정도로 삶은 온갖 희망을 허망하게 하고 상실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통한 받아-들임은 그렇게 사태를 몸으로 익혀서 나의 몸과 의식에 배게 함으로써 사태를 종결, 종식, 급기야 무화(Nichtung)시킵니다. 내 신앙감각은 더 이상 고통, 괴로움, 억울함, 죽음과 같은 한계상황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 신이 바로 곁에 있음을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신앙은 고난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에서 ‘본받음’으로의 비약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선하게 살려고 하다가, 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세계에 투신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최소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관념은 그랬습니다. 물론 삶도 고통스러워 힘겨운데 온갖 삶의 질고를 지고 간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은 가혹한 말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부르심(vocati)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방향을 결정짓는 한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Christus passus est pro vobis(vos, 너희들), vobis relinquens(남겨놓다, 남겨놓고 죽다) exemplum, ut sequamini vestigia(발자취) eius]. 무엇으로 인간이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을 위하여(pro)라는 말, 그리스도인을 위하여라는 말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그리스도 자신의 한계상황으로 짊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도 자신의 한계상황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저주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짊어지고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뒤따름(sequamini; sequor)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주어지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한계상황을 받아들임은 달리 그리스도의 삶에 물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을 인류를 위한 행동이라고 받아들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개인의 이익관심에만 머물지 않고 생명을 위한 삶을 살라는 본보기였습니다. 뒤에서(nach) 따라감(folge)은 내가 그렇게 살겠다는 수락과 응낙(Folge)이자 그리스도인의 의무(Folge)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수없이 중첩되는 한계상황을 극복하거나 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안일하고 습관적인 신앙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본보기 삼아서 따르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그리스도인을 부르신 이유(hoc)입니다.

공자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도리를) 안 사람이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다”(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述而>, 19장)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세 사람이 길을 걸어간다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리어 본받고 그들의 좋지 않은 점으로는 나 자신을 바로잡는 것이다”(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述而>, 21장)라고 말했습니다. 태어나보니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던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종교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그리스도인 줄 알고 그리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알았다면 마땅히 뒤따름,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삶을 살게 마련입니다. 신앙의 스승이자 하느님의 마음을 밝히 깨달았던 그리스도의 삶의 행적을 낱낱이 배우고 익혀서 몸으로 구현해내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의 목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는 인간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죽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peccatis mortui(mortuus) iustitiae viveremus(vivo)]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음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면서 자리에서는 상석만을 생각하고, 삶에서는 늘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서 아귀다툼의 선두에 서고, 성공을 위해서는 타자의 아픔과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이 인간을 부르신 목적은 자신의 한계상황을 깨닫고 대의를 위한 삶을 살다간 그리스도처럼 올바른 삶, 의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죄의 유한성을 안고서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를 뒤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예전의 그리스도, 현재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부름이 오늘도 우리에게 들리고 있습니다.

(1베드 2,19-25)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청장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