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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오늘의 명상] 씨알의 인간학 - 심미적 인간, 아름다운 맘을 찾습니다

by anarchopists 2020. 1. 1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9/09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씨알의 인간학4
심미적 인간, 아름다운 맘을 찾습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아름다움이란 신의 유출(流出)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완벽한 미는 신에게만 있다고 보고, 모든 아름다운 존재는 절대자의 반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의 개념은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미학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칸트 같은 철학자도 미의 본질을 묻는 대신에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었습니다.

심지어 마르셀 뒤샹(M. Duchamp) 같은 작가는 일상적 오브제(objet)인 화장실의 ‘변기’를 가지고 ‘fountain’(샘)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내놓음으로써 일대 예술사의 전환기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예술작품이라고 인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간의 유파, 기법, 작품의 아우라(aura)와는 전혀 관계없이 레디-메이드(ready-made)의 선택에 따라 예술작품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니 그야 말로 예술과 미학계는 지금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의 시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맞물려서 그 어느 때보다도 미(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요즈음, 미에 대한 숱한 정의와 개념이 난무하지만 정작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은 실현될 수가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한국이 낳은 세기의 사상가 함석헌은 아름다움을 ‘맘의 아름다움’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상의 아름다움보다는 주체의 아름다움 즉 주관의 아름다움의 상태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또 너희 마음에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너희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란 결국 너희 맘씨의 아름다움이다... 너희 맘씨, 너희 혼...”(함석헌저작집 1, 들사람 얼, 한길사, 2009, 127, 이하 쪽수만 표기). 그러므로 몸의 외형을 꾸미고, 몸을 덧칠하고, 세계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미보다 맘의 아름다움, 영혼의 아름다움, 맘씨의 아름다움이 더 근원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은 타자와의 ‘소통’이어야 합니다. 가식을 벗고 마음과 말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맘’이라는 우리말에서 풍기는 뉘앙스처럼 시공간적 여유와 일치, 동의, 설득을 위한 내면의 소리들을 교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통의 미학’이라고 말합니다. “서로서로는 저 때문만이 아니고 남 때문에 아름다워진다... 가리고 꾸미는 옷을 벗어야 한다. 그래서 마음이 통할 수 있어야 있다. 서로 벗이 될 수 있다. 서로 말을 할 수 있다”(118-121). 이처럼 맘과 맘 사이에는 여백이 있기 때문에 벗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맘과 맘 사이에 자신을 감싸는 거추장스러운 가식이 있고, 외형적인 것들로 포장하는 것들이 있다면 맘은 멀어집니다. 사귐이 불가능해지고 만다는 얘기입니다. ‘붕지’(朋知) 혹은 ‘동붕’(同朋)이라고 하는 서로 벗이 되는 사회미학적 소통은 정치나 사회 곳곳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모두가 자신을 두텁게 가리고 표피적 삶과 거짓된 관계들을 형성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름다움 자체도 속일 수 있는 사회라면 이 사회와 정치의 진정성은 사라진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진과 선을 추구하던 사회에서 ‘미적 사회’로 접어든 우리 사회가 무엇보다도 진정한 ‘맘씨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이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아, 맘과 맘이 통하는 그대 아름다운 이름 ‘붕지’이어라.

또한 아름다움은 “앎답다”입니다. “남이 알아줄 만큼 값이 있다는 말”입니다(122). 값이 있다고 해서 실용적 가치, 사용가치나 화폐가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설령 두 사람이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 인정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마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남이 알아준다’는 것은 미적 소통, 미적 감정, 도덕감각(道德感覺)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됨을 얻을 때 가장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될 수 없는 것을 맞대놓고 거기서 하나됨을 찾으려 하는 때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아름다움의 감정은 결국 불쌍히 여김의 감정, 곧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미(美)와 선(善)이, 또 선과 진(眞)이 다른 것이 아니다”(119). 남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미학, 사랑의 미학, 그래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의 미학은 궁극적으로 “앎답다”로 통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함석헌은 도덕정신, 종교의 궁극적 존재미학을 말합니다. 우리의 겉꾸밈보다 도덕적 정신의 발현이 아름답고, 신-앞에-있음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도덕정신, 그보다도 무한에 대한 종교적 애탐이 없다면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 들국이 아름답고 기러기가 아름다웠던 것은 우리 속에 깊이 깃들어 있는 도덕성 때문이다... 남들이 무슨 옷을 입었나, 무슨 양산을 들고 무슨 가방을 팔에 걸었나에만 정신을 쓰는 이 사람들아, 그렇지 않은가? 너희는 거울 앞이나 쇼윈도 앞에서만 서려 하지 말고 천지 앞에 하나님 앞에 서보려 하면 어떠냐?”(123) 그래서 그는 그 아름다움의 근원적 모방을 “예수의 겸손의 아름다움”, “온유의 아름다움”(129)에서 발견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아름답다는 말은 균제, 균형이 잘 이루어진 몸이나 완벽한 몸의 비례적 곡선이 살아 있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라 일컬어진 외형적 아름다움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학습되어 있는 것이고, 게다가 그 미에 대한 이상과 감각마저도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이나 정치는 미를 “허영심”으로 소비하고 소진하도록 방기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마음의 아름다움’은 이미 옛말이 돼버렸습니다. 얼마나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뜯어고치고 스펙으로 자신의 삶을 꾸미느냐에 따라서 그의 “삶의 미학”을 ‘참’으로, 혹은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삶에 대해 함석헌은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어떤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냐? 무한을 안을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지. 어떤 마음이 무한한 마음이냐? 참된 마음이지. 허영심이, 가장 적고 추한 마음이다. 네 마음속에서 허영심을 버려라”(133). (2010. 09. 09 새벽,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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