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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고통 없이 고통을 맞설 수 없는 삶(필립 2,5-11)

by anarchopists 2020. 4. 6.

고통 없이 고통을 맞설 수 없는 삶(필립 2,5-11)

 

구원은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마치 어느 특정인의 고통과 죽음으로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은 듯이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칫 죄책의 짐을 한 사람에게 지우고 다른 나머지 인류는 거저 받은 구원을 누리기만 되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로렌스(D. H. Lawrence)<사랑의 고통>이라는 긴 시를 보면 좀 더 우리의 공통의 책임적 구원의 고통을 알 수가 있을 듯합니다. “작은 시냇물/ 황혼 빛으로 흐르고/ 푸르스름한 하늘이/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 풍경/ 이것은 거의 황홀의 경지/ 다들 잠자리에 든 시간/ 모든 말썽과 근심과 고통이/ 황혼 아래로 사라져 버렸네/ 이젠 황혼과 시냇물의/ 부드러운 흐름뿐/ 시냇물은 영원히 흘러서 가리라/ 그대 위한 사랑 여기 있음을/ 나는 깨닫는다/ 내 사랑을 본다/ 황혼과 같은 전체를 본다/ 내 사랑, 큰 사랑, 아주 큰 사랑/ 일찍이 보지 못한 사랑/ 작은 불빛과 불똥과 온갖 장애물/ 말썽과 근심과 고통으로 보지 못한 사랑/ 그대 부르고 나 대답하고/ 그대 원하고 나 완수하고/ 그대는 밤 나는 낮/ 이것 이상 무엇이 또 있을까/ 이것으로 완전하고 충분한 것/ 완전히 충분한 것/ 그대와 나 또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알 수 없어라/ 왜 우리는 그래도 고통스러운가!”

장문의 시에서 읽히는 것은 나와 너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완전하고 충분한사랑이면 되는 것을, 두 사람만 서로 마주보면 되는 것을 왜 사랑은 배고프고 서글퍼야만 하는 것일까요? 사랑은 봐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 맞대면하지 못하는 석양이 붉게 물드는 저녁에는 볼 수 없다는 고통이 자꾸 자꾸 강해집니다. 사랑은 서로 보면서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싹이 듭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존재만으로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존재는 노을이 저 서편에 짙은 붉은 색을 띠게 되면 고통으로 아련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어떤가요? 육체적 한계, 고통의 한계를 뛰어 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육체와 세속의 시공간에 대해서 저항했던 예수, 그는 죽음의 석양에서 인간의 죽음과 유한성에 저항하는 모범을 보입니다. 죽음의 이편에서 삶의 저편을 자신의 십자가로 끄잡아 들이는 것은 역설입니다. 십자가를 구원의 미학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까뮈는 육체의 판단은 정신의 판단에 맞먹는 가치가 있으며 육체는 소멸 앞에서 뒷걸음질을 친다고 말합니다. 그의 문장에는 매우 강한 힘이 넘칩니다. 육체가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 뒤로 물러선다는 표현으로 인간의 삶의 의지, 저항 의지를 엿보게 해줍니다. 예수는 신으로서의 인식과 존재를 버립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육체적 한계를 취합니다[qui(, 어떤, 무슨) cum in forma Dei esset, non rapinam(탈취, 착취) arbitratus(의견, 의사) est esse se(자기를) aequalem Deo]. 예수는 인간의 죄를 받아들이면서 인간과 맞대면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통해 하느님과는 등지는 육체적 한계로서의 죄성을 적극적으로 감당합니다. 한 때 예수에게 낮이 되었던 시공간이 인간을 위해서 밤을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사랑으로 품는다는 것, 그것은 예수의 고통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이었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고통을 자신의 한계와 고통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사랑의 발로입니다.

인간의 석양과 밤을, 자신의 낮과 맞바꿀 만큼의 사랑은 고통으로서 승화됩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예수만의 고통이 된다면 그의 죽음이 헛되다고 할 것입니다. 까뮈는 다시 한 번 더 말합니다. “구원의 호소 없이 살 수 있는가를 아는 것, 그것이 나의 관심을 끄는 전부이다.” 인간은 하느님에게 구원의 호소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물음이자 고통입니다. 끊임없이 예수처럼 살아야 하는 자기 책임이자 다시 인간 자신의 삶을 위한 물음입니다[Hoc(여기에, 이러한 이유 때문에) sentite(느끼다, 경험하다, 품다) in vobis, quod(그러나, ~ 때문에) et in Christo Iesu]. 그래서 예수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결국 인간 전체의 공통의 물음이자 책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디즘도 마조히즘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를 따라(모방하여) 구원을 성취하고 세계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책임과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과 세계의 죽음에 대한 저항입니다!

 

예수는 죄를 삼켜버림으로써 하나의 세계, 구원의 세계를 창조하였습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 저항하고 신이 되려는 것에 자발적인 저항을 하였으며 마침내 살고자 하는 욕구로부터도 저항을 하였습니다[sed(그러나) semetipsum(자기 자신을) exinanivit(비우다, 탕진하다, 휩쓸다, exinanio) formam servi accipiens(용납하다, 받아들이다, accipio), in similitudinem hominum factus(태어난, ); et habitu(모양, 생김새) inventus ut(처럼, 같이) homo]. 그러나 그러한 의지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까뮈의 철학에서 간취한 신념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반항, 그리고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리하여 최대한으로 많이 느낀다는 것, 이것이 사는 것이며 또한 최대한으로 사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이 스스로 죄와 삶의 유한성에 대해서 반항하고 저항하자, 그리고 자유를 누리자라는 까뮈의 외침은 자못 인간의 의식을 일깨우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죄에 대해서 맞서고 저항하기는커녕 인식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합리화하면서 십자가를 살짝 비껴가려고 했습니다.

예수는 죄에 대해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순수한 마음과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 순종하였습니다. 죄에 대해서 저항하고 구원에 대해서는 순종한 자신의 극치는 다음의 문장에서 드러납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humiliavit semetipsum(자기 자신을) factus oboediens usque(계속하여, ~까지) ad(향하여, ~대하여, ~있어서) mortem, mortem autem(그리고, 그런데) crucis].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신앙적 사건이란 예수는 죄에 대해서는 종이 아니라, 당당한 인간의 모습으로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죄에 대해서 굴종적이고 수치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적인 마음과 태도, 그러한 가치와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하느님의 뜻과 마음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과 똑같은 존재(similitudinem hominum)만이 하느님의 뜻과 마음으로 죄에 대해서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 similitudinem은 직역하자면, ‘유사한’, ‘닮은’(similitudo)으로 해야 좀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의 사람과 같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가 훨씬 더 의미를 잘 전달해줍니다. 그는 본질(esse)적인 면에서는 하느님과 동등하다고(aequalem)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동등함마저도 버리고 동등하려고 하는 의지까지도 저항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인간에게 중요한 신앙 태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느끼고 경험해야(sentite) 합니다. 낮춤과 비움, 그리고 순종(Gehorsam, 말을 잘 들음) 혹은 뒤따라감(folgen)이 필요합니다. 순종은 귀 기울여 듣는 것(horchen)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인간으로서의 심정으로 올바로 듣고 따르는 모습, 모양, 태도를 보여준 예수를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감지하느냐(sentio) 하는 것이 예수의 구원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세계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예수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자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자신 또한 그렇지 않은지를 반성한다(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里仁>, 17)고 했습니다. 또한 다 끝났구나! 나는 아직 자기의 허물을 보고서 마음속으로 반성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公冶長>, 26)라고 하면서 한탄을 하였습니다. 종교인, 특히 그리스도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닮아가겠다고 하면서 정작 은덕과 혜택만을 바랄 뿐이지, 그의 삶을 따라서 사는 데는 게으르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지금 여기에서 느끼고 경험하면서 그렇게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처신일 것입니다. 또한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자기의 신앙적 내면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면서 반성을 하면서 고쳐나가려고 해야 그리스도의 구원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시대에 예수의 비움(Leere, 자기의식이 없이 신적 의식으로 가득 참)과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음(lassen)이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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