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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시들지 않는 구원이여

by anarchopists 2020. 4. 20.

시들지 않는 구원이여

 

믿음이 있는 사람은 희망을 봅니다!

 

사람들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자그마한 희망(spas, spem)이라도 찾으려고 합니다. 희망에 작은 것과 큰 것을 나눈다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희망은 상대적입니다. 절망적인 죽음의 상황에서 보면 작은 것도 큰 희망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희망을 품으면서 그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상적으로 보이는 것만이 희망의 실체인 것처럼 믿어버립니다. 희망이 갖는 의미와 그 영원성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시적인 나의 절망적 상황만을 타개한다면 희망의 구실을 다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희망은 어떤 최초의 존재가 그의 모범에 따라서 주는 결과로서 많은 이들에게 가져온 것이 보편적인 가능성이 된다고 보기에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준 희망은 자신의 사라짐과 다시-삶이라는 불연속성의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실재를 경험하게 해주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희망, 곧 그리스도와 동일한 상속(hereditatem, hereditas; 유전)을 약속받았다는 데에 많은 기대를 갖게 만듭니다. 그 기대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단서가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per fidem)라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사라짐과 다시-삶이라는 사건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믿음은 역행이 아닙니다. 무슨 대단한 역량을 가진 개념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한결 같은 마음과 행위에 대한 신뢰입니다. 큰 것도 작은 것도 세계의 모든 사건도 하느님의 시선 속에서 보면 그 사건이 갖는 편견이 사라집니다. 믿음은 그렇게 자신의 편견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볼 때 인간의 사라짐과 다시-삶도 그분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사라짐은 싫고 다시-삶만이 좋기에 항상 후자만을 진리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의 욕망이지 하느님의 생각은 아닙니다. 죽고 살고 하는 것은 나의 소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희망을 믿음의 눈으로 보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애로운 시선 속에 자신의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삶만이 있고 사라짐은 없었으면 하고, 오직 삶만을 지속하는 것이 하느님이 인간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버립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삶과 생명에 대한 오만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미래의 상속과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의 유전자를 자신의 몸속()에 간직하기를 원한다면 우선 자신을 하느님의 신뢰 속에 완전히 내던져 놓아야 합니다.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하느님을 마치 자연과도 빗대어 노래를 합니다.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를 두드리시네/ 건반 위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아도/ 섬돌에, 양철 지붕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엔 하나님도 답답하셔서 잠 한숨도 못 이루시네”(<봄비>).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의 신뢰는 온 세계를 감싸고도 남습니다. 비가 내리면 사방에 하얀 물이 뒤덮이고 그 물세례로 자연이 촉촉한 하늘 기운을 머금듯이 말입니다. 세계는 하느님의 손을 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손은 사방에도 있지만, 동시에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 손을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비가 하느님이 되어 이 땅에 내린다고 본 것처럼, 믿음에도 신앙적 상상력이 있어야 합니다. 불경한 상상력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도처에 있다는 표현이 이미 신학적 상상력인 것처럼, 믿음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나타나고 있는 하느님의 손을 볼 수 있는 신앙적 상상력이 구원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시들지 않도록, 구원이 부서지지 않도록, 구원이 퇴색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상상력처럼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는 하느님의 그 답답한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답답하고 힘겨운 마음만을 생각할 뿐이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느님의 그 답답함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본 적도 없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non videritis, diligitis(좋아하다, 존중하다)]이 믿음의 상상력입니다. 비록 본 적이 없지만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온갖 열망을 그에게 모은다(dis-lego)는 말입니다. 한 존재에 대해서 마음을 모으고 열정을 모아서 집중한다는 것이야말로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은다는 그 자체는 존재에 대한 거룩하고 경건한 손 모음에 대한 예법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그렇게 그리스도 자신의 사라짐을 통한 흩어짐이 오히려 하느님을 향한 마음 모음으로 나타난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인간의 사라짐 역시 하느님의 품속으로 흩어진 것 같지만, 하느님의 품 안에서 다시 살기 위한 흐름이요 과정으로서 하느님의 신뢰 안에 있는 신앙적 이치입니다.

 

고통 없는 순수함은 없습니다!

 

동양의 고전 대학(大學)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로이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이르게 하는 데 있다). 혹자는 명덕(明德)을 서양철학자 칸트(I. Kant)가 말한 순수이성 혹은 실천이성과도 같다고 해석합니다. 또 다른 학자는 본연의 밝은 것이라는 의미로 새기는 반면, 왕양명은 일체의 인()으로 풀어 밝혔습니다. 사람이 믿음을 갖는 것도 영혼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구원을 얻는다거나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유전자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은 부차적입니다. 그것이 최종목적이기 위해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영혼을 살피는 일입니다. 영혼을 살피는 일은 지고(至高)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끊임없는 자기 살핌은 순수한 마음으로 가는 과정으로서 고통스럽습니다. 구원에 공짜가 없는 법입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이란 것은 자신이 서고자(이루고자 혹은 나서고자) 할 때 남부터 서게 하고, 자신이 뜻을 이루고 싶을 때(발전, 통달, 달성) 남부터 뜻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미루어서 남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가까운 자신을 미루어 남의 입장에 빗대어 볼 수 있다면)이 바로 인의 실천방법이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雍也>, 28). 동양철학에서는 이것을 일명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라짐은 고통 받는 동일한 인간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자신이 하늘 소리를 들은 것도 자신의 영달을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하늘 명령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위한 삶이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고통, 가난, 질병, 억압, 강제 등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자비심, 본래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늘 명령을 수행하다가 사라진 사람입니다. 이렇듯 순수한 사람의 영혼은 고통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우선하여 그것을 타자가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문제 중에 하나가 개별적 이익관심이 강하다 보니 점점 더 타자에 대한 배려가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그 피해가 당연한 듯이 바라보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희망은 욕망으로 점철되면서 그것을 항구적인 안정된 장치로 마련하기 위해서 타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정신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구원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구원은 하느님의 신뢰보다는 물질적인 신뢰에 바탕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순수함은 퇴색되고 영혼과 정신을 바라보는 눈은 어두워졌습니다. 공자나 그리스도가 생각했던 인이나 사랑은 타자에 대한 배려가 먼저입니다. ‘박시제중’(博施濟衆), 넓게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제도(구제)한다는 이 말이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구원과 맞닿아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그리스도 이후에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가 내세웠던 구원이 바로 자기 자신보다 타자를 위한 삶이었음을 잘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의 경험적 잣대보다 하느님의 처분을 신뢰하며, 비록 순수함의 고통이 나를 힘겹게 하더라도 타자와 더불어 살기 위해 하늘이 부여해 준 본래적인 영혼을 때 묻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1베드 1,3-9)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 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청정관(靑莊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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