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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67

함석헌 서거 21주기, 간디 서거 62주기 추모 학술모임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08 06:20]에 발행한 글입니다. 임의진 시인 ▲ 임의진 시인* 임의진/ 작가, 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 무교회주의에서 출발한 자치 토착교단 최태용의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남녘교회 담임목회(1995-2004), 저서 , 외 다수. 한겨레신문 종교인 칼럼에 이어 현재는 ‘경향신문’ 칼럼 연재, 월간 ‘기독교 사상’에 성서연구 연재 중.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 퀘이커, 집단 신비주의1) 길을 찾는 자들, 정통의 고수가 아닌 진리를 향한 유랑 " 묵주 돌고 돌아도 마음은 돌지 않았지, 묵주는 왜 들고 있나? 온갖 학문 다 배워도 예절을 모르는데, 학문은 무슨 소용? 기도로 밤을 새워도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는데, 철야는 왜 하나? 씨 없이는 요.. 2020. 1. 24.
길을 묻는다-간디의 길, 함석헌의 길, 나의 길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09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임의진 제 2회] 2) 퀘이커, 뽕나무 아래서 자고 일어난 한 나그네를 맞다 "가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니고 회교도도 아니고 힌두교인도 아닌, 어느 한 종파에 갇히지 않는 너무나 큰 하나님을 모시는 우리"(이리에 유끼오, 오오즈마 여자대 교수)인 퀘이커는 간디의 이상적 종교상과도 상통한다. 간디는 말한다. “나는 내 집의 모든 방향에 벽이 둘러 쳐지고 창문과 문들로 막혀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나라의 문화들이 가능한 한 거리낌없이 내 집에 불어오기를 바란다. 나의 종교는 감옥의 종교가 아니다. ” 또 이렇게도 말했다. “종교들은 사람들을 서로에게서 떼어놓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을 함께 묶기 위하여 있는 .. 2020. 1. 24.
함석헌, 케이커, 집단주의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10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임의진 제3강] 3) 하나님을 만나 보는 것, 단체 명상, 집단 신비주의 퀘이커는 이미 집단이다. 개인이 아닌 '우리들'이다. 퀘이커는 자신들을 친우회(Society of Friends)라고 한다. 그들은 우정과 신앙과 영성의 추구라는 감정으로 집단을 형성한다. 어떤 특수한 건물 형식이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친우들은 “우리에게 전혀 꾸미지 않은 방이라도 주소서. 그리하면 거기서 하나님 당신을 뵈오리이다”고 말한다. 예배 모임은 퀘이커 생활의 본질이다. 주일이 되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배모임을 갖는다. 하나님을 함께 찾아나감으로써 또한 서로서로를 찾게 된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목회자가 될 수 있고 함께 .. 2020. 1. 23.
[임의진, 제 4강] 함석헌, 케이커, 집단신비주의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11 07:06]에 발행한 글입니다. [임의진 제4강] 4) 고난 침묵 저항, 마중물들의 외침 소리 북미인디언 마크맥어로 기도란 "하나되어 말하기"라는 뜻의 '올수터미'라고 한다. 일생동안 '신과 하나되어 말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 장소와 특정 중개자가 필요없다. 매순간 신과 하나되어 삶 전체로 드리는 명상과 기도가 바로 참된 기도라고 그들은 믿는다. 혹자는 부와 명예, 멋진 집과 자동차를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다가 들이닥칠 생태적 폐해와 지구 전체 질서의 혼란이 가중될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말이다. 기도란 불의와 탐욕에 저항하고 거부하며, 자본의 권력을 부정하는 행위여야 한다.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 2020. 1. 23.
[이거룡 제1강] 간디의 길, 함석헌의 길, 나의 길-길 위의 삶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1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거룡 제1강] 간디의 길, 함서헌의 길, 나의 길- 길위의 삶 "너는 씨알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 … 기나긴 5천 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동양에서 진리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말은 '도'(道), 즉 길이라는 말이다. 인도전통의 요가(yoga)라는 말도 길(margā)이라는 말이다. 요가는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이때 길은 어디엔가 이르는 과정이 아니다. 길 따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 따로가 아니라, 길이 곧 목적지요 목적지가 곧 길이다. 그래도 굳이 한쪽 편을 들라 한다면, 길은 '존재'(being)보다는 '흐름'(becoming)을 본질로 한다. 흐르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 2020. 1. 23.
[이거룡 제2강] 길을 묻는다-간디와 함석헌의 회통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16 08:27]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거룡, 제2강] 2. 간디와 함석헌의 회통 함석헌이 간디의 이름을 들은 것은 ‘스물이 한 둘 넘어서'인 3.1운동 무렵이었다. “간디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3.1운동 후였습니다. 우리가 그 비폭력 반항(非暴力反抗)을 하던 그 해가 마침 간디가 인도에서 대대적으로 비폭력 운동을 일으킨 때입니다. 그러므로 신문으로 잡지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단편적인 것이었고, 1923년 일본에서 로망 롤랑의 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의 생애와 그 운동의 대체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29년 간디의 일본 방문이 예정대로 성사되었다면 두 사상가의 만남이 .. 2020. 1. 23.
[이거룡 제3강] 길을 몯는다- 간디는 간디고, 나는 나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1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거룡, 제3강] 간디는 간디고, 나는 나다. 간디가 지극히 보통 사람으로 내면과 저항을 동시에 추구하고 실현했다는 점도 함석헌에게는 매력적이었다. 간디는 천재도 아니고 특별한 스승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한 그렇다고 간디만의 무슨 극적인 사건도 없었다. 한마디로 해서 간디는 자기를 계발한 사람이다. 이 점에서 그의 길은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특별한 어떤 능력이나 신비체험을 한 사람만이 따를 수 있는 기이 아니라, 무식한 백성이라도 생각만 깨면 따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으로 보았다. “간디는 자기와 씨알의 구별이 없다. 자기가 곧 씨알이 돼서 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자선이니, .. 2020. 1. 23.
[이거룡 제4강] 진리는 하나, 길은 여럿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22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거룡, 제4강] 진리는 하나, 길은 여럿 진리실현의 길에서 간디와 함석헌의 중요한 공통점은 종교의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하나지만 여기에 이르는 길은 여럿 있을 수 있다는 힌두교의 오랜 전통은 함석헌의 종교관과 맞아떨어진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그의 말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종교는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시대와 장소에 맞게 끊임없이 그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생명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전수히 어머니 몸에서 오는 것으로 살지만, 생명이 자라서 어느 시기에 오면 거기가 도리어 죽는 곳이요 어서 .. 2020. 1. 23.
[이거룡 5강] 나의 길, 역마살의 축복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23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거룡, 제5강] 나의 길, 역마살의 축복 나는 지금도 비행기가 어떻게 땅에서 뜨는지,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앞날개에 제트엔진이 달려있어서 마치 고무풍선에 가득 채워진 바람이 일시에 빠질 때 풍선이 일정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비행기도 그렇게 이륙하고 비행한다는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아마 중학교 때였던가, 비행기 동체는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듀랄루민'이라는 가볍고 단단한 합금으로 만든다고 배웠는데,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설사 그렇다 해도, 아무리 날개에 성능 좋은 제트엔진을 달고 듀랄루민으로 가벼워진 몸이라는 것을 안다 해도, 막상 활주로에 몸을 뉘인 그 큰 덩.. 2020.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