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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이거룡 제1강] 간디의 길, 함석헌의 길, 나의 길-길 위의 삶

by anarchopists 2020. 1. 2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1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거룡 제1강]


간디의 길, 함서헌의 길, 나의 길- 길위의 삶

"너는 씨알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 … 기나긴 5천 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동양에서 진리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말은 '도'(道), 즉 길이라는 말이다. 인도전통의 요가(yoga)라는 말도 길(margā)이라는 말이다. 요가는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이때 길은 어디엔가 이르는 과정이 아니다. 길 따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 따로가 아니라, 길이 곧 목적지요 목적지가 곧 길이다. 그래도 굳이 한쪽 편을 들라 한다면, 길은 '존재'(being)보다는 '흐름'(becoming)을 본질로 한다. 흐르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 간디에게 길은 아힘사(ahiṃsa)'와 사띠야'(satya)이며, 함석헌에게 길은 '씨알'이다.

살아있는 자는 길 위에 있다. '살아있다'는 말은 '괘지 않고 흐른다'는 말이며, 흐름은 한쪽으로 기우뚱할 때 일어난다. 기우뚱한 균형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길 위의 삶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러나 살아있는 흐름을 원한다면 기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삶이 기우뚱하지 않다면, 그래서 위험하지 않다면, 죽음이 오기 전에 이미 죽어있는지도 모른다.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유행(遊行)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 자이나교에서는 한 곳에서 이틀 이상 머리를 눕히는 것을 금했다. 어디엔가 머문다는 것은 다만 다시 떠나기 위한 멈춤일 뿐이었다. 수하좌(樹下座)와 걸식(乞食)을 삶의 기본으로 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에서 내일을 보장하지 않는, 위험한 삶이었다. 스스로가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며 사는 것이 수행자의 삶이라는 말이다. 누구든 무엇이든 내일이 보장되면 썩기 때문이다.

간디와 함석헌은 동양근현대사에서 길 위의 삶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준 증인들이다. 간디의 삶은 비폭력의 진리가 가장 구체적으로 실험된 예다. 아니, 그 실험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 해야 한다. 폭력의 우위가 확연하던 정복의 시대에, 그는 비폭력의 우위를 몸소 실험하고 또한 그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테러에 의한 그의 죽음은 우리가 "이 고통 받는 세계에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그의 신념을 의심하게 했지만, 그의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나와 같은 수백만 명이 자신의 평생 동안에 이 진리를 증명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실패일 뿐 절대 이 영원한 법칙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간디의 길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길은 시험 중이다.

간디의 소금행진은 길 위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전형이다. 소금행진 속에는 베다(Veda)이래 수천 년 인도역사가 녹아있다. 격정(激情)보다는 적정(寂靜)이, 폭력보다는 비폭력이 진리의 길임을 보여주었다. 이 일로 간디는 민중으로부터 마하뜨마(mahātma)라는 존칭을 얻었다. 소금행진은 '가능한 것에 대한 포기'를 통하여 초월에 이르는 인도인들의 길을 농축하고 있다. 수동성의 우위를 보여주었다. 역설적이게도 초월은 언제나 포기를 통하여 일어난다.



함석헌, 그는 야인이었다. "밤에는 시원한 뽕나무 아래서 한 숨 자고, 다음날 아침 유랑을 계속하는 나그네"였다. 함석헌 속에는 온갖 다양한 길이 만난다. 동서양의 모든 길이 만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때 외국의 언론들이 그에게 ‘한국의 간디 퀘이커 함석헌’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지만, 그는 퀘이커도 아니었고 간디도 아니었다. 그에게 퀘이커리즘은 단지 새 종교의 씨앗을 담긴 가능성의 종교였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우리의 나갈 길은 간디를 배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외쳤지만, 또한 그는 “간디는 간디고 나는 나야 하지” 라는 생각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일본유학 시절부터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를 배우고 실천하였지만, 그는 결코 무교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우찌무라는 우찌무라고 함석헌은 함석헌이었다. 기실 그는 어떤 주의나 사상 혹은 종교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냥 자유인이 아니다. 자유란 언제나 피 냄새를 풍길 수밖에 없음을 몸소 보여준 자유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차라리 그는 선사에 가깝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선사다. 영원한 구도자였다. 길 위의 사람, 도인(道人)이었다.

함석헌의 길은 참으로 꼭 집어서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길이다. 함석헌을 처음 만난 미국인 퀘이커 아터 미첼(Arthur Mitchell)의 눈에 그가 ‘퀘이커 회원이 되기 이전에 이미 퀘이커’로 보였던 것처럼, 어찌 보면 노자나 장자 같고, 어찌 보면 우찌무라간조같고, 또 어찌 보면 끄리슈나무르띠(J. Krishnamurti)같다. 기독교 측에서 보면 너무 정치적이었고, 재야 운동권에서 보면 너무 종교적인, 그래서 늘 아웃사이더였다. 워낙에 다양한 사상들이 함석헌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에게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글쎄요”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가 ‘뜨뜻미지근해서’가 아니다. 죽을 때까지 그는 형성도상에 있는, 그래서 늘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씨이었기 때문이다. (이거룡, 내일 계속)

이거룡님은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한 후 인도 마드라스 대학 라다크리슈난 연구소(석사), 델리대학 대학원(박사)를 졸업했다. 'EBS 세상보기' 강좌를 통해 심원한 인도의 사상과 문화를 쉽고 생동감 있게 다룬 바 있다. 현재 서울 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있으며 인도학교를 개설 중이다. 저서로는 라다크리슈난의 명저 <인도철학사>(전4권, 한길사)를 우리말로 옮겼으며, 저서로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와 공저로 <논쟁으로 본 불교철학> <구도자의 나라>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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