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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함석헌 서거 21주기, 간디 서거 62주기 추모 학술모임

by anarchopists 2020. 1. 2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08 06:20]에 발행한 글입니다.

임의진 시인

▲ 임의진 시인
* 임의진/ 작가, 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 무교회주의에서 출발한 자치 토착교단 최태용의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남녘교회 담임목회(1995-2004), 저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외 다수. 한겨레신문 종교인 칼럼에 이어 현재는 ‘경향신문’ 칼럼 연재, 월간 ‘기독교 사상’에 성서연구 연재 중.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 퀘이커, 집단 신비주의

1) 길을 찾는 자들, 정통의 고수가 아닌 진리를 향한 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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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 돌고 돌아도 마음은 돌지 않았지, 묵주는 왜 들고 있나?
온갖 학문 다 배워도 예절을 모르는데, 학문은 무슨 소용?
기도로 밤을 새워도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는데, 철야는 왜 하나?
씨 없이는 요구르트가 되지 않아, 바후, 우유가 탈 때까지 끓여도 말야"
(무슬림 시인 술탄 바후 신비주의 시집, <죽어라! 그대가 죽기 전에>에서)

함석헌에게, 물려받은 제도로서의 교회는 마음이 돌지 않은 묵주이거나 예절을 모르는 학문이면서 동시에 체험 없는 기도요, 씨 없이 만들다가 실패한 요구르트가 아니었을까. 예수도 바로 '오늘 양식'을 구하라고 했다. 함석헌은 무교회와 퀘이커 신앙으로 ‘절실하게’ 오늘의 양식, 오늘의 걸음을 걸어갔다. 확신과 기쁨 보다는 환멸과 곤경을 안겨주는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신앙인의 ‘고독하면서도 때로 친밀한’ 친우(親友)공동체를 세우려는 시도는 사실 교회 제도가 생긴 이래, 그 역효과에 고통받는 이들로 인하여 끊임없이 시도된 몸부림이었다. 1893년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라는 깃발아래 새로운 신앙 집단을 형성했다. 교회의 형식을 버리고 매달 성서연구(Seisho no kenkyu)를 발간하면서, 조그만 성서 공부반을 인도하였던 게 무교회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무교회 신앙공동체를 ‘교회없이 떠도는 기독교 고아원’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1927년부터 그의 신앙동지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석과 함께 한국 최초의 무교회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무교회에 이름을 등재한 지도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무교회와 인연하였을 뿐 무교회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후 1953년 <대선언>을 통해, ‘참된 하나의 종교를 찾기 위해 교회에도 죽고 무교회에도 죽겠다’ 하며 걸어간 길엔 바로 퀘이커(The Quakers)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교회를 닮았으면서, 동시에 벽이 없이 진리로 다가가는 '하나의 종교'를 꿈꾸며 세계인을 품어내고, 세계 평화를 세워 내고, 지성적인 것이 전부가 아니라 ‘집단 신비주의’를 받아들이는 퀘이커의 너른 품은 함석헌에게 새롭고 높은 이상의 종교 세계에 다름아니었다.

“퀘이커는 신비주의와 상식주의를 둘 다 경험해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종교에서 문제되는 것의 하나는 신비주의입니다. 퀘이커 발생 초기에 있어서는 신비주의가 상당히 강했다면 강했던 듯합니다. 영국 서북방 농민들이 타락한 국교의 모양을 보고 거기서 자기네의 종교적인 양심에 만족될 수 없음을 보고 자기네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임을 같이 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함석헌, ‘예배 모임의 뜻’, 현대의 선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 1985)
오순절 다락방 사건은 예수의 진리 안에서 취득한 집단 신비주의 체험이었다. 이것이 제도 교회안에서 작동할 때는 그러나 염증을 일으키는 경우가 잦았다.

경박한 열광주의와 현실을 외면하는 타계주의, 그리고 영적 리더를 과잉 숭배하고 씨알이 아니라 한 개인 우상의 카리스마에 요동치는 여러가지 염증을 유발했다. 이에 반하여 찾는 이들(seekers) 가운데 조지 폭스는 ‘모든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목사나 설교자의 도움 없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방도로서, 퀘이커를 일으킨다. 퀘이커는 오순절의 원시 신비주의에 입각하여 스스로 깨달아 알며, 이를 고백하고, 서로 속빛을 알아가면서 사귀는 독특한 신앙 행동을 가진 개신교 일파다.

직업적인 유급 목사도 무슨 특별한 예배형식도 없이 ‘친우들’ 공동체는 꾸려졌다. 그들이 대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떨었기’에 퀘이커라 불리었고, 영국에서 미대륙으로 건너가 오로지 평화뿐이라는 견해를 지속적으로 내비친다. 이는 기성 교단 뿐 아니라 제국의 무수한 박해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어쩌면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요한복음 10, 16) 예수 목자, 나아가서 진리와 속빛의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를 형성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임의진/ 시인,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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