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16 08:27]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거룡, 제2강]
함석헌이 간디의 이름을 들은 것은 ‘스물이 한 둘 넘어서'인 3.1운동 무렵이었다. “간디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3.1운동 후였습니다. 우리가 그 비폭력 반항(非暴力反抗)을 하던 그 해가 마침 간디가 인도에서 대대적으로 비폭력 운동을 일으킨 때입니다. 그러므로 신문으로 잡지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단편적인 것이었고, 1923년 일본에서 로망 롤랑의 <간디전>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의 생애와 그 운동의 대체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29년 간디의 일본 방문이 예정대로 성사되었다면 두 사상가의 만남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함석헌 선생은 일본에서 갓 학교를 졸업할 당시였으므로, 사상가 대 사상가의 만남은 불가능했겠지만, 아무튼 특별한 만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후 미국에서 단행본으로 냈던 <영 인디아>를 구해 읽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5.16 이후에 간디 자서전을 읽게 된다. 1958년 몇몇 사람들고 간디 연구회를 만들고 매주 일요일 오후마다 모여 간디 자서전을 함께 읽는 독회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그해 7월에 서리를 맞았다. 나중에는 장기홍(章基弘), 장한성(章翰成) 형제와 함께 간디 자서전을 우리말로 번역 출판하게 된다.
이와 같이 5.16이후 60년대 초반부터 함석헌이 간디에 깊이 심취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 부합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간디를 배워야 하는 첫째 이유는 우리와 인도의 사정이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 지칠 대로 지쳐서 살자는 의욕을 거의 잃어버린 점에서 인도와 우리는 아주 흡사하다. 다 죽은 시체 같은 민족에 새 정신을 불어넣어 그것을 하나로 통일하여 그 힘으로 손에 바늘 하나 든 것 없이 순전히 정신의 힘으로 영국의 세력을 몰아낸 것이 인도다.
이런 점에서 배울만하다. “해방 후 열다섯 해가 지나는 동안, 6.25도 겪어보고, 이 정권 밑에 신음도 해보고, 4.19도 치러보고 새 정부라고 만들어 이만큼 어물어물 해봤으면, 이제는 이 민족이 어느 만큼 무지무력(無知無力)한 것이 뻔히 드러났다.” 오던 길을 버리고 새로 새 길을 시작해야 한다. “그 새 길을 찾는 것은 간디가 보여준 길을 따라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의 나갈 길은 간디를 배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4.19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겪고난 이후의 결론이다. 따라서 ‘씨알들에게 간디를 스승으로, 친구로 소개’해 주는 것이 글을 배운 책임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간디에 대한 함석헌의 천착이 반드시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보다 중요한 내면의 이유는 간디야말로 ‘내면’과 ‘저항’을 동시에 추구하고 실현한 전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저항운동가이기 전에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인으로 생각했던 함석헌에게 내면과 저항의 조화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었다. 내면과 저항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점에서 함석헌은 간디와 맞아떨어진다. 저항에서 내면으로 또는 내면에서 저항으로 뛰어드는 사상가들과는 달리 간디와 함석헌은 내면과 저항을 동시에 추구하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동시에 추구되며, 개인의 영성을 일깨우는 것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을 제거하는 일이 함께 추구된다.
간디를 배우자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했다. 그것이 옳은 길이다. 인류가 오늘 당하는 고민은 종교를 무시하고 모든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결과로 오는 것이다. 원래 종교와 정치는 하나라는 것이 함석헌의 입장이다. 그것은 마치 혼과 몸의 관계와 같다. 이 둘 간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가 무너지면 문제가 생긴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그가 동서양의 여러 종교와 철학을 섭렵하는 종교적 방랑자의 길을 걷는 가운데 얻은 결론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인도사상이 지니는 비중도 크다고 본다. 함석헌은 자유를 위한 저항운동가의 삶이 종교적 진리추구자의 삶과 별개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종교적 양심이 결여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는 바람직한 종교일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일생을 통한 믿음이었다.
이 점은 함석헌이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혹은 진리파지(眞理把持, satyagraha)에 대한 이해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간디나 함석헌에게 비폭력 저항운동은 곧 진리파지 그 자체이다. 하나가 먼저고 다른 하나가 나중인 것이 아니라, 그 둘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간디의 투쟁의 핵심은 곧 ‘저(자아)를 드러냄'이며, 이러한 과정은 절대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항의 원동력은 폭력이 아니라 ‘혼의 힘’이며, 이로써 폭력에 기인하는 불의를 이긴다는 것이다. 혼(아트만)의 힘을 드러내는 것, 것이 곧 비폭력 저항이며, 그것은 ‘하나의 조직적인 사랑’이다. 저의 드러냄이 마침내 절대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곧 범아일여이며, 간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이것이다. 함석헌은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라는 정치 투쟁의 배후에 놓인 그의 종교와 믿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간디의 길은 밖으로만 정치인 동시에 안으로는 종교, 즉 믿음이다.”
어떤 의미에서 함석헌은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자체보다는 그 배후에 놓인 간디의 신앙에 주목하고 있다. 간디가 저항운동가이기 전에 신앙이 두터운 사람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에도 라마 나마를 외웠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단순한 신앙의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간디는 외양으로 분주한 정치 활동을 하고 있으나 속살은 종교의 사람이다.” 낮에는 활동을 하고 밤이면 종교라는 지하실에 내려가 내일의 활동을 위한 힘을 기른 사람이다. 어떤 면에서 간디의 신앙은 매우 보수적 미신적인 것 같지만, 함석헌은 간디의 신앙이 ‘철두철미 뚫어비치는 이성의 신앙’이라고 평가한다. 이것은 간디가 그와 같이 위대한 신앙인이면서도 무슨 신비주의 비슷한 체험이나 기적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거룡, 내일 계속)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한 후 인도 마드라스 대학 라다크리슈난 연구소(석사), 델리대학 대학원(박사)를 졸업했다. 'EBS 세상보기' 강좌를 통해 심원한 인도의 사상과 문화를 쉽고 생동감 있게 다룬 바 있다. 현재 서울 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있으며 인도학교를 개설 중이다. 저서로는 라다크리슈난의 명저 <인도철학사>(전4권, 한길사)를 우리말로 옮겼으며, 저서로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와 공저로 <논쟁으로 본 불교철학> <구도자의 나라>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이거룡, 제2강]
2. 간디와 함석헌의 회통
함석헌이 간디의 이름을 들은 것은 ‘스물이 한 둘 넘어서'인 3.1운동 무렵이었다. “간디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3.1운동 후였습니다. 우리가 그 비폭력 반항(非暴力反抗)을 하던 그 해가 마침 간디가 인도에서 대대적으로 비폭력 운동을 일으킨 때입니다. 그러므로 신문으로 잡지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단편적인 것이었고, 1923년 일본에서 로망 롤랑의 <간디전>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의 생애와 그 운동의 대체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5.16이후 60년대 초반부터 함석헌이 간디에 깊이 심취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 부합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간디를 배워야 하는 첫째 이유는 우리와 인도의 사정이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 지칠 대로 지쳐서 살자는 의욕을 거의 잃어버린 점에서 인도와 우리는 아주 흡사하다. 다 죽은 시체 같은 민족에 새 정신을 불어넣어 그것을 하나로 통일하여 그 힘으로 손에 바늘 하나 든 것 없이 순전히 정신의 힘으로 영국의 세력을 몰아낸 것이 인도다.
이런 점에서 배울만하다. “해방 후 열다섯 해가 지나는 동안, 6.25도 겪어보고, 이 정권 밑에 신음도 해보고, 4.19도 치러보고 새 정부라고 만들어 이만큼 어물어물 해봤으면, 이제는 이 민족이 어느 만큼 무지무력(無知無力)한 것이 뻔히 드러났다.” 오던 길을 버리고 새로 새 길을 시작해야 한다. “그 새 길을 찾는 것은 간디가 보여준 길을 따라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의 나갈 길은 간디를 배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4.19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겪고난 이후의 결론이다. 따라서 ‘씨알들에게 간디를 스승으로, 친구로 소개’해 주는 것이 글을 배운 책임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간디를 배우자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했다. 그것이 옳은 길이다. 인류가 오늘 당하는 고민은 종교를 무시하고 모든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결과로 오는 것이다. 원래 종교와 정치는 하나라는 것이 함석헌의 입장이다. 그것은 마치 혼과 몸의 관계와 같다. 이 둘 간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가 무너지면 문제가 생긴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그가 동서양의 여러 종교와 철학을 섭렵하는 종교적 방랑자의 길을 걷는 가운데 얻은 결론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인도사상이 지니는 비중도 크다고 본다. 함석헌은 자유를 위한 저항운동가의 삶이 종교적 진리추구자의 삶과 별개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종교적 양심이 결여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는 바람직한 종교일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일생을 통한 믿음이었다.
이 점은 함석헌이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혹은 진리파지(眞理把持, satyagraha)에 대한 이해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간디나 함석헌에게 비폭력 저항운동은 곧 진리파지 그 자체이다. 하나가 먼저고 다른 하나가 나중인 것이 아니라, 그 둘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간디의 투쟁의 핵심은 곧 ‘저(자아)를 드러냄'이며, 이러한 과정은 절대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항의 원동력은 폭력이 아니라 ‘혼의 힘’이며, 이로써 폭력에 기인하는 불의를 이긴다는 것이다. 혼(아트만)의 힘을 드러내는 것, 것이 곧 비폭력 저항이며, 그것은 ‘하나의 조직적인 사랑’이다. 저의 드러냄이 마침내 절대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곧 범아일여이며, 간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이것이다. 함석헌은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라는 정치 투쟁의 배후에 놓인 그의 종교와 믿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간디의 길은 밖으로만 정치인 동시에 안으로는 종교, 즉 믿음이다.”
어떤 의미에서 함석헌은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자체보다는 그 배후에 놓인 간디의 신앙에 주목하고 있다. 간디가 저항운동가이기 전에 신앙이 두터운 사람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에도 라마 나마를 외웠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단순한 신앙의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간디는 외양으로 분주한 정치 활동을 하고 있으나 속살은 종교의 사람이다.” 낮에는 활동을 하고 밤이면 종교라는 지하실에 내려가 내일의 활동을 위한 힘을 기른 사람이다. 어떤 면에서 간디의 신앙은 매우 보수적 미신적인 것 같지만, 함석헌은 간디의 신앙이 ‘철두철미 뚫어비치는 이성의 신앙’이라고 평가한다. 이것은 간디가 그와 같이 위대한 신앙인이면서도 무슨 신비주의 비슷한 체험이나 기적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거룡,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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