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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길을 묻는다-간디의 길, 함석헌의 길, 나의 길

by anarchopists 2020. 1. 2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2/09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임의진 제 2회]

2) 퀘이커, 뽕나무 아래서 자고 일어난 한 나그네를 맞다

"가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니고 회교도도 아니고 힌두교인도 아닌, 어느 한 종파에 갇히지 않는 너무나 큰 하나님을 모시는 우리"(이리에 유끼오, 오오즈마 여자대 교수)인 퀘이커는 간디의 이상적 종교상과도 상통한다. 간디는 말한다. “나는 내 집의 모든 방향에 벽이 둘러 쳐지고 창문과 문들로 막혀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나라의 문화들이 가능한 한 거리낌없이 내 집에 불어오기를 바란다. 나의 종교는 감옥의 종교가 아니다. ” 또 이렇게도 말했다. “종교들은 사람들을 서로에게서 떼어놓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을 함께 묶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종교들은 왜곡되어 분쟁과 상호간의 살육의 잠재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간디는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보았는가, 참사람되어)

종교(Religio)란 곧 "묶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이상향으로 상대방 이웃과 함께 묶인 민중들이 사티아그라하(비폭력저항) 운동을 일으켜 세계를 변혁하는데, ‘창문이 열린 종교’만이 그 길잡이 노릇을 단단히 하게 될 것이다.

간디는 상대방 이웃을 위해 가죽 신발을 꿰메어 주고, 상대방을 위해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주며 자기 내면은 깊은 침묵과 신비의 날개를 친다. 어떤 면에서는 익명의 퀘이커라고 할만한 삶을 함석헌의 등불 간디 또한 걸어갔던 것이다. “비록 종파적인 의미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지만, 예수의 고난의 모습은 세상과 세속 차원에서 나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영원한 비폭력 신앙 구조의 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처럼 믿는 수백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가 우리에게 영원한 사랑의 법칙에 의해 삶의 전부를 조절하도록 가르치지 못하였다면, 예수는 헛되이 살았고 죽은 것입니다.” (간디, 하느님의 아이들, 1939년 1월 7일 선집 68:278권)

이처럼 간디와 퀘이커는 함석헌의 좋은 스승이요 길잡이였다. <대선언> 이후 특정 종교에 함몰되지 않던 함석헌에게 간디와 퀘이커는 뽕나무 그늘 같은 안식이요 신선한 아침바람이었다. 일찍이 1921년 오산학교에서 조지 폭스의 글을 접한 이후, 일본에서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던 함석헌은, 1967년에 이르러 퀘이커 일원이 되었음을 공식화 한다. “속 생명”과 “속의 빛”에 감화 받은 함석헌은, “서양 사람에게서 나온 종교 중에서 가장 동양 사람에게 가까운 사상이 퀘이커다”라고 평가한다.

“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시원한 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아침 유랑을 계속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 유랑하는 나그네를 흔쾌히 쉬게 해 준 퀘이커는 함석헌을 필라델피아로 초대한다. 발표자도 십여년 전쯤 필라델피아 펜들힐 퀘이커 회관에 방문했었는데, 거기 함석헌 옹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무척 반가웠다. 함석헌은 펜들힐에서 10개월간 머문 이후, 영국 우드부룩 퀘이커 공동체로 여행한다. 퀘이커 루트를 따라 유랑하면서 그는 퀘이커를 깊이 만나고 퀘이커의 예배 속에서 집단 신비주의와 세계평화실천에 웅숭깊고 달디단 영적 매료를 느낀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던 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어리석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그러나 못 할 말이었습니다. 이미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재 영웅 이상 로맨티시즘 개인 예언자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잘나고 못 났어도, 개인의 뒤에는 늘 전체가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행동과 사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넓게 말하면 오늘날 되어 있는 종교가 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들이 말하는 단체적 신비주의는 깊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함석헌, 1970년 5월 9일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저) 역서에 부치는 글)

퀘이커의 단체적 신비주의란 일종의 ‘명상’ ‘기도’를 뜻한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나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ham, Sokhon, "the Voice of Ham Sokhon," friend journal, p9)

임의진 시인

▲ 임의진 시인
* 임의진/ 작가, 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 무교회주의에서 출발한 자치 토착교단 최태용의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남녘교회 담임목회(1995-2004), 저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외 다수. 한겨레신문 종교인 칼럼에 이어 현재는 ‘경향신문’ 칼럼 연재, 월간 ‘기독교 사상’에 성서연구 연재 중.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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