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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70

거룩의 현상학: 부정(不淨)한 것은 거룩의 선택을 빼앗는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7/02 01:50]에 발행한 글입니다. 거룩의 현상학: 부정(不淨)한 것은 거룩의 선택을 빼앗는다! 시간이 갈수록 종교가 예사롭지 않다. 종교의 성직 지망자가 어느 종단에서는 모자라고, 또 다른 종단에서는 넘치는 기이한 현상, 수도자의 수급 위기, WCC 개최 문제를 놓고 용공좌경이니 동성애 옹호 집단이니 하면서 흠집 내기에 바쁜 보수 종교단체의 행태, 성직자의 성추문과 금전 문제로 인한 구속 등. 종교나 종교 성직자의 본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리도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함석헌의 해법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유일의 조건은 ‘거룩’이다. 저가 거룩한 고로 저에게 가는 자는 거룩할 수밖에 없다. 저는 반드시 .. 2019. 11. 3.
나도 종북좌빨인가?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2/28 06:12]에 발행한 글입니다. 나도 종북좌빨인가? 걱정이다 어느 날(2014년 2월 초) 서울에 불일이 있어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양평에서 음식점을 하는 지인을 만나 점심이나 할까 하고 전화를 걸었다. 마침 점심 약속에 있어 양수리에 있는 음식점(순두부집)로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지인이 또 동네 분(제3자 내외분이라고 하자)을 모시고 나왔다. 하여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거하게 점심상이 들어왔다. 밥상이 들어오자 제3자의 부인이 기도를 하자고 한다. 그리스도교(개신교)식 기도를 한다. 우리는 개신교 신자가 아닌데.. 그냥 묻어갔다. 우리는 가톨릭신자이다. 식사 때 웬만한 때가 아니면 결코 밥을 먹을 때 성호(聖號)를 긋지 않는다. 혹 내가 가톨릭.. 2019. 11. 1.
환상 너머 공백과 꽉 찬 무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4/23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환상 너머 공백과 꽉 찬 무 현상 너머에는 환영만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매우 캄캄한 공간에는 암울한 침묵만이 짙게 깔리고 고통스러운 마음의 심연은 바다의 수심만큼이나 깊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 공간과 시간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저 공백, 무, 허무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나약함, 안일함, 무관심, 방관 등은 충격적인 죽음/죽임으로 몰고 갑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무능력한 정부의 허둥지둥 대는 꼴이라니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밖에 달리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녀린 목숨.. 2019. 10. 30.
세계에 저항하는 정신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5/14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세계에 저항하는 정신 세상을 비워내고 부정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무(Nichts, 無), 실재의 허무뿐일까요? 세상을 거부하고 그것의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존재론적 위상의 문제와 세계의 거부는 세계 그 자체의 퇴폐에 있습니다. 따라서 존재 망각, 존재의 퇴락이 세계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세계에 대한 저항은 필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세계가 무사유로 일관하는 욕망의 동체라면 주체의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을 위해서라도, 정신의 히스테리 가능성을 떠나야 합니다. 함석헌이 “세상을 버리면 정신값이 돌아오고 정신적 보화가 돌아온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 2019. 10. 30.
복음의 상업화와 자본화를 넘어서 복음의 아나키즘을 향하여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6/14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복음의 상업화와 자본화를 넘어서 복음의 아나키즘을 향하여 복음(福音)은 그리스 어원적으로 ‘기쁜 소식’(euangelion, good news) 혹은 ‘좋은 소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보자면 예수 그 자체가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민중들에게 기쁨과 구원과 해방과 화해를 가지고 온 것처럼,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종교에게는 그야말로 순기능적인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석헌은 헐값에 “복음이 팔린다.”고 비판합니다. 복음이 터무니없는 상술적인 자본의 가치에 매매가 되고 있다고 보는.. 2019. 10. 29.
자본을 넘어 정신세계로의 상승과 이성의 시대(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7/14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자본을 넘어 정신세계로의 상승과 이성의 시대(2) 종교는 그러한 희망을 만들어주는 역할은 합니다. 종교는 인간 자신과 삶을 자각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력으로 라는 점입니다. 의식적 정신, 자기 의지라는 겁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내가 노력해서 깨닫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그런 폐단이 많은데 신앙이야말로 자기 스스로 해야지 남의 것을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처음에는 모방해서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끝까지 모방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모방하면 그것은 죽은 것이지 산 것이 아닙니다.”(함석헌, 앞의 책, 361쪽)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종교가 맹목적으로,.. 2019. 10. 28.
종교의 난감함과 한계, 그리고 교황방문에 대한 만념(萬念)(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7/29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난감함과 한계, 그리고 교황방문에 대한 만념(萬念)(1) 종교 간 대화란 허상일까요? 각 종단의 수장(首長)들이 만나서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함께 사진촬영을 하는 것으로 종교 간 화해·이해·일치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까요? 필자는 시간이 갈수록 회의적이기만 합니다. 사실 그들만의 잔치 혹은 종교 간에 화합을 도모한다는 홍보용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지나친 생각일까요? 사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와 정교회, 개신교와 성공회, 개신교와 개신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심연들이 존재합니다. 전통이라는 것을 가장한 배타성을 띤 경계와 울타리들이 있어서 서로 남보듯 합니다. 이.. 2019. 10. 28.
종교적 세계의 몽롱한 경지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8/07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적 세계의 몽롱한 경지 종교적 지향성은 바깥(외적) 세계의 관심보다 오히려 내적 세계 혹은 내면세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항상 외물(外物)을 향하여 있음이 아니라 인간 안의 정신·영혼을 향하여 있음을 지향합니다. 함석헌이 ‘홀로-있음’이라는 존재론적 신앙 태도를 강조하는 것도, “홀로”라는 종교인 내면의 자기 투쟁적인 헌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396쪽). 홀로라고 하는 것이 자기 고립과 자기 소외를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이 독단적이고도 독선적인 코기토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종교의 속으로 들어가는 침잠을 의미합니다. 자기 확신이나 .. 2019. 10. 28.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9/03 19:15]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2019.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