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8/07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적 지향성은 바깥(외적) 세계의 관심보다 오히려 내적 세계 혹은 내면세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항상 외물(外物)을 향하여 있음이 아니라 인간 안의 정신·영혼을 향하여 있음을 지향합니다. 함석헌이 ‘홀로-있음’이라는 존재론적 신앙 태도를 강조하는 것도, “홀로”라는 종교인 내면의 자기 투쟁적인 헌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396쪽). 홀로라고 하는 것이 자기 고립과 자기 소외를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이 독단적이고도 독선적인 코기토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종교의 속으로 들어가는 침잠을 의미합니다. 자기 확신이나 자기 판단도 없으면서 공동체적인 맹신과 맹목으로 은거와 자기 침묵을 수행하지 못하는 종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의식과 신앙인식을 바로 대면하지 못합니다. 종교적 지향성을 달리 해야만 종교 본연의 신앙 내용과 실천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는 그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상대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함석헌이 지적하듯이, 자기 자신, 곧 “나를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겉살림”으로만 일관할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96쪽).
무릇 종교현상은 그것을 통하여 나의 나됨과 세계의 규명, 즉 진정한 나와 세계(속의 나)와의 관계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나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자는 현상학적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의식과 인식에 앞서서 나를 지각하거나 알지 못하는 한 세계를 늘 왜곡된 상태로 볼 것입니다. 겉살림이나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은 지각된 나, 지각하는 나, 의식된 나, 의식하는 나, 그리고 지각과 의식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따라서 종교인은 고독해야 합니다. 세계와 사물에 앞서 자신의 신앙의식이 나타남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99쪽). 세계와 사물을 추방하고 자기의식과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지각된 존재 그 자체, 의식 그 자체를 밝히려면 고독·은둔·침묵·관상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석헌은 이를 이렇게 풀어갑니다. “동양의 『주역』에 있는 말로는 성인이란 마음을 씻어서 깨끗한 데 이르는 분이라 하였어요. 그래, 그럼 마음을 씻는다면 어떻게 씻을까? 그럴 때의 한 가지 할 수 있는 말이란 “마음을 가라앉힌다”예요. 잡념이 여러 가지 있지만 마음을 가라 앉혀서 평상을 하면 하느님을 접할 수 있다...”(함석헌, 위의 책, 400쪽) 마음을 가라앉힘, 평상심을 가짐, 깨끗한 마음을 소유함, 순수한 의식, 순수한 마음으로 들어갈수록 초월자와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초월자의 나타남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나타난 곳 마음속이기에, 그곳으로 들어가야 초월자의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의식의 바깥에 온갖 혼란스럽고 탁한 것, 불투명하게 지각된 것, 불확실한 현상으로 흔들리는 순수의식을 가능한 한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에 종교 본질의 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의 근본이 되는 마음, 마음 중에 가장 순수한 마음을 양심으로 보면서 초월자를 양심보다 더 큰 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깨끗해야 초월자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402-404쪽). 사실 초월자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말을 빌려 말하면, 나타남은 나타나는 대로 있습니다. “나타남이 나타날 뿐입니다.”(Jean-Paul Sartre, 정소성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18쪽) 그러므로 의식을 순수하게 할수록 초월자는 오롯이 지각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헤겔(Hegel)이 말한 ‘윤리적 실체로서의 개인’은 순수한 의식과 순수하지 못한 의식이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의식은 순수하지 못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이 지각하는 것이 순수하지 못한 외물적 관심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의식과 지각은 매순간 순수의식을 자각하려 하지 않는 이상, 예기지 못한 맹목,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말한 “종교적 세계의 몽롱한 경지”(공포의 변증법, 새물결, 2014, 247쪽)로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순수한 의식과 생각, 반성적 신앙의식을 향해 의식과 실천을 지향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맹목과 몽환, 그리고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종교인이 의식하고 있는 것이, 종교인의 사고방식이 순수하게 나타남 그 자체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지각된 것 그 자체인가를 매순간 깨닫지 않으면 의식의 부재(absence)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의식이 만들어 놓은 초월자의 형상이나 표상을 배거해야 합니다(함석헌, 앞의 책 404-405쪽). 그것을 순수의식의 나타남이라고 착각하고 믿음의 본질로 받아들이게 되면 편견과 아집, 오류의 신앙진술만이 난무하게 됩니다. 그것을 참이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하느님의 말씀은 “올바른 말”, “자유를 주는 말”,“어려움 속에 있어서도 용기를 나게 하는 위로가 되는 말”, “장래를 보고 희망을 가지는 말””이라고 단언하면서 오늘날 종교 현실을 보면 거짓말만 있고 진실은 없다고 한탄하고 말씀의 기근 속에 있음을 비판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407쪽). 자칫 종교적 언어가 그 의미를 상실하면 “그리스도교의 죽음”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말은 없습니다. 상업용 언어, 마켓팅 언어, 값싼 언어 등으로 초월자를 개시하고 현시하려고 하지만 그런 언어로는 초월자의 나타남, 초월자는 현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존재한다고 잘못 인식하여 말씀의 배후에 무언가가 숨어 존재한다고 철썩 같이 믿는 것을 보면 종교는 죽음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참말은 옳은 말입니다. 종교의 언어는 옳은 말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기근 속에 참된 말을 발견하기 위해서 다시 “마음의 지하수”를 캐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들어가 그 속에서 참말을 만나야 합니다. “모든 물의 근원은 비에 오는 거지만 지금은 당장 내리지 않아도, 않았으면 않았을수록 땅을 깊이 파는 겁니다. 깊이 파야 샘이 나는 겁니다... 종당은 깊은 물을 팠던 사람만이 살아남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408쪽) 신앙의식의 근거는 참말입니다. 신앙의식의 법칙은 옳은 말입니다. 속 깊은 말 속에, 순수한 말 속에서 나타남 그 자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말이 터져 나와서 그야말로 말씀을 말하는 이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현상, 신앙현상은 종교 언어와 종교적·신앙적 사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속에 참말이 있는지, 거짓말이 있는지는 “경전”을 비춘 말인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말하는 주체, 곧 발화자가 종교서술, 종교서사를 말할 때는 반드시 “경전을 비추어가면서 우물을 깊이 파는”(함석헌, 위의 책, 409쪽) 자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경전에 참 길이 있고 신앙의식의 발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난 말은 거짓입니다. 해석은 있을 수 있으나 순수의식에 의해서 나타난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 발화자는 거짓입니다. 종교인을 모두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고 삶의 근거를 거짓말에 의해서 구성되도록 의도하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길, 아련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는 참된 길을 말해주는 시가 있습니다.
<잊혀진 길>
한 때는 무수한 사람들이 오고 가던 소란한 길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에 차여 크지 못하던 질경이와
그 질경이 같은 뚝심으로 일어서는 아침 햇살, 현란한 광채를 꿈꾸며
길은 뻗어 있었다
어딘지 모를 먼 미래 쪽으로, 혹시 우리들이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인지도 모를 그 시간 속으로
길은 선명히 뻗어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 길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의 소란스럽던 발길은 끊어지고
대신 크지 못하던 질경이와 그 질경이의 뚝심 같은 햇살이
길을 덮고 있었다
하나둘 포근한 하늘 속으로 들지 못한 넋들이
그 길가에 서성이며 수런수런 풀들의 흐느낌으로 묻혀갈 때
난 알았다, 그 길을 열고 닫는 건 아직도 낯선 길가에 서성이는
생명의 귀한 넋들이란 것을
유진택, 아직도 낯선 길가에 서성이다, 문학과지성사, 1996, 12쪽에서 인용.
앞에서 종교지향성은 외물이 아니라 내적 세계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입니다. “현란한 광채를 꿈꾸는” 정신입니다. 가능한 한 순수의식이어야 합니다. 마음의 근저에 순수함과 맞닿아 나타남 그 자체는 인간의 삶과 신앙을 계도합니다. 말로써도 순수한 나타남 그 자체를 다 서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내면의 의식의 심층으로 내려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초월자를 독대해야 하는 신앙태도가 요구되는 것입
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더불어 말을 듣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분별하십시오. 발화자가 나타남 그 자체, 존재 그 자체와 상관하면서 나타난 말씀인지를, 신앙 반성에 입각한 말인지를 잘 인식해야 합니다. 더불어 아직 한 번도 가본 길이 아니지만 그 낯선 길을 경전에 기대어 가보도록 안내하고 그 경전에서 ‘생명의 길’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발화자와 청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진리의 길, 낯선 길은 침묵만 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수런수런”, “두런두런”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종교적 세계의 몽롱한 경지
무릇 종교현상은 그것을 통하여 나의 나됨과 세계의 규명, 즉 진정한 나와 세계(속의 나)와의 관계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나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자는 현상학적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의식과 인식에 앞서서 나를 지각하거나 알지 못하는 한 세계를 늘 왜곡된 상태로 볼 것입니다. 겉살림이나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은 지각된 나, 지각하는 나, 의식된 나, 의식하는 나, 그리고 지각과 의식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따라서 종교인은 고독해야 합니다. 세계와 사물에 앞서 자신의 신앙의식이 나타남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99쪽). 세계와 사물을 추방하고 자기의식과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지각된 존재 그 자체, 의식 그 자체를 밝히려면 고독·은둔·침묵·관상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석헌은 이를 이렇게 풀어갑니다. “동양의 『주역』에 있는 말로는 성인이란 마음을 씻어서 깨끗한 데 이르는 분이라 하였어요. 그래, 그럼 마음을 씻는다면 어떻게 씻을까? 그럴 때의 한 가지 할 수 있는 말이란 “마음을 가라앉힌다”예요. 잡념이 여러 가지 있지만 마음을 가라 앉혀서 평상을 하면 하느님을 접할 수 있다...”(함석헌, 위의 책, 400쪽) 마음을 가라앉힘, 평상심을 가짐, 깨끗한 마음을 소유함, 순수한 의식, 순수한 마음으로 들어갈수록 초월자와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초월자의 나타남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나타난 곳 마음속이기에, 그곳으로 들어가야 초월자의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의식의 바깥에 온갖 혼란스럽고 탁한 것, 불투명하게 지각된 것, 불확실한 현상으로 흔들리는 순수의식을 가능한 한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에 종교 본질의 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의 근본이 되는 마음, 마음 중에 가장 순수한 마음을 양심으로 보면서 초월자를 양심보다 더 큰 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깨끗해야 초월자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402-404쪽). 사실 초월자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말을 빌려 말하면, 나타남은 나타나는 대로 있습니다. “나타남이 나타날 뿐입니다.”(Jean-Paul Sartre, 정소성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18쪽) 그러므로 의식을 순수하게 할수록 초월자는 오롯이 지각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헤겔(Hegel)이 말한 ‘윤리적 실체로서의 개인’은 순수한 의식과 순수하지 못한 의식이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함석헌은 “하느님의 말씀은 “올바른 말”, “자유를 주는 말”,“어려움 속에 있어서도 용기를 나게 하는 위로가 되는 말”, “장래를 보고 희망을 가지는 말””이라고 단언하면서 오늘날 종교 현실을 보면 거짓말만 있고 진실은 없다고 한탄하고 말씀의 기근 속에 있음을 비판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407쪽). 자칫 종교적 언어가 그 의미를 상실하면 “그리스도교의 죽음”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말은 없습니다. 상업용 언어, 마켓팅 언어, 값싼 언어 등으로 초월자를 개시하고 현시하려고 하지만 그런 언어로는 초월자의 나타남, 초월자는 현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존재한다고 잘못 인식하여 말씀의 배후에 무언가가 숨어 존재한다고 철썩 같이 믿는 것을 보면 종교는 죽음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참말은 옳은 말입니다. 종교의 언어는 옳은 말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기근 속에 참된 말을 발견하기 위해서 다시 “마음의 지하수”를 캐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들어가 그 속에서 참말을 만나야 합니다. “모든 물의 근원은 비에 오는 거지만 지금은 당장 내리지 않아도, 않았으면 않았을수록 땅을 깊이 파는 겁니다. 깊이 파야 샘이 나는 겁니다... 종당은 깊은 물을 팠던 사람만이 살아남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408쪽) 신앙의식의 근거는 참말입니다. 신앙의식의 법칙은 옳은 말입니다. 속 깊은 말 속에, 순수한 말 속에서 나타남 그 자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말이 터져 나와서 그야말로 말씀을 말하는 이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현상, 신앙현상은 종교 언어와 종교적·신앙적 사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속에 참말이 있는지, 거짓말이 있는지는 “경전”을 비춘 말인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말하는 주체, 곧 발화자가 종교서술, 종교서사를 말할 때는 반드시 “경전을 비추어가면서 우물을 깊이 파는”(함석헌, 위의 책, 409쪽) 자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경전에 참 길이 있고 신앙의식의 발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난 말은 거짓입니다. 해석은 있을 수 있으나 순수의식에 의해서 나타난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 발화자는 거짓입니다. 종교인을 모두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고 삶의 근거를 거짓말에 의해서 구성되도록 의도하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길, 아련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는 참된 길을 말해주는 시가 있습니다.
<잊혀진 길>
한 때는 무수한 사람들이 오고 가던 소란한 길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에 차여 크지 못하던 질경이와
그 질경이 같은 뚝심으로 일어서는 아침 햇살, 현란한 광채를 꿈꾸며
길은 뻗어 있었다
어딘지 모를 먼 미래 쪽으로, 혹시 우리들이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인지도 모를 그 시간 속으로
길은 선명히 뻗어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 길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의 소란스럽던 발길은 끊어지고
대신 크지 못하던 질경이와 그 질경이의 뚝심 같은 햇살이
길을 덮고 있었다
하나둘 포근한 하늘 속으로 들지 못한 넋들이
그 길가에 서성이며 수런수런 풀들의 흐느낌으로 묻혀갈 때
난 알았다, 그 길을 열고 닫는 건 아직도 낯선 길가에 서성이는
생명의 귀한 넋들이란 것을
유진택, 아직도 낯선 길가에 서성이다, 문학과지성사, 1996, 12쪽에서 인용.
앞에서 종교지향성은 외물이 아니라 내적 세계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입니다. “현란한 광채를 꿈꾸는” 정신입니다. 가능한 한 순수의식이어야 합니다. 마음의 근저에 순수함과 맞닿아 나타남 그 자체는 인간의 삶과 신앙을 계도합니다. 말로써도 순수한 나타남 그 자체를 다 서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내면의 의식의 심층으로 내려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초월자를 독대해야 하는 신앙태도가 요구되는 것입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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