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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거룩의 현상학: 부정(不淨)한 것은 거룩의 선택을 빼앗는다!

by anarchopists 2019. 11.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7/02 01:50]에 발행한 글입니다.


거룩의 현상학: 부정(不淨)한 것은 거룩의 선택을 빼앗는다!



시간이 갈수록 종교가 예사롭지 않다. 종교의 성직 지망자가 어느 종단에서는 모자라고, 또 다른 종단에서는 넘치는 기이한 현상, 수도자의 수급 위기, WCC 개최 문제를 놓고 용공좌경이니 동성애 옹호 집단이니 하면서 흠집 내기에 바쁜 보수 종교단체의 행태, 성직자의 성추문과 금전 문제로 인한 구속 등. 종교나 종교 성직자의 본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리도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함석헌의 해법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유일의 조건은 ‘거룩’이다. 저가 거룩한 고로 저에게 가는 자는 거룩할 수밖에 없다. 저는 반드시 많은 선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남김없이 찢어서 거룩히 구별한 심장을 원한다.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만을 보는 것, 하나님만이 있는 곳을 거룩한 곳이라 한다. 저 이외의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심판의 자리에서 신생하는 자의 유일의 길은 스스로 자기를 거룩한 것으로 바치는 데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304쪽)


거룩은 오직 초월자만 생각하고 초월자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는 그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 초월자를 빙자해서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좇고, 초월을 핑계 삼아 성욕과 물욕을 채우려 하고 있을 뿐이다. 초월자에게는 접근 불가한 것들을 섬기고 숭배하는 행위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종교의 뒷골목 현실에서 거룩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신자를 얽어매기 위한 허울 좋은 종교 언어, 강압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초월자의 거룩함은 신자의 거룩함으로 통한다. 흠잡을 데 없이 온전한 상태의 삶을 추구하라는 당위명령, 정언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수행적 언어를 퇴색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삶이 치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룩한 삶이란 신앙 인식, 신앙 의식의 철저함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 물질문명은 우리의 의식을 느슨하게 하다못해 타협하게 만든다. 실존의 절박함이 사라진 것이다. 실존의 자기 책임적 삶을 살아내고자 초월자에게 바짝 밀착된 우리의 신앙 행위는 그럴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흠집이 조금 난다고 무슨 대수랴. 거룩은 단지 종교 공동체에서 필요할 때만 읊조리는 무의미한 형식 언어가 돼버린 지 오래다. 더 이상 종교의 거룩으로 적어도 윤리와 도덕을 재단하던 시대는 지나가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대는 초월자마저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촘촘히 얽어매고 꽉 조여진 문명과 정보, 물질의 풍요, 과잉 건강과 여가는 거룩으로 방향잡는 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이제는 선택의 자율성, 혹은 선택의 의지에서 ‘인간의 자유’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것과 저것의 기로에서 인간의 자유로움을 저해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생각과 실천의 방향성이 바뀔 수 있어야 한다. 거룩은 초월자의 온전함이자 자신의 순수 자유이다. 거룩에는 타율성이 섞일 수 없다. 그것은 자유 그 자체이며, 동시에 그 누구도 원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바로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의 상태이다. 그것이 타율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도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이어도 선택할 수 있다면 거룩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신의 속성도 될 수 없을뿐더러 신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거룩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것 자체를 선택해서 살아야 할 자유이고, 그럼으로써 삶의 의미 단계가 한층 높아지는 신적 행복, 초월적 행복이 깃들어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확신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이루어진 신자의 마땅한 도리와 인간의 자부심을 갖고 사는 체험적 결과로서 주어진다.



거룩과 관련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성직자의 자격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함석헌도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선지자의 사명은 생존하사 변함없는 우주적 권위로써 명한 것이므로 변하는 길이 없었다... 목사 중에는 영혼보다 ‘떡’을 위해 더 염려하는 이가 자못 많다. 그가 직업적 목사일지언정 참 신도의 영혼을 인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아니었다. 선지자에도 허다한 가짜 선지자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하신 것이 아니요 자기면허 혹은 학교의 면허였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을 그들의 입에 넣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319-320쪽)


함석헌은 모름지기 성직자란 인간에 의해서 주어지는 면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초월자에 의해서 부여되는 자격이다.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 같지만 거룩한 삶, 종교적 삶의 근본적 태도와 본래성이 무너진 데에는 이 상식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직이 포화상태가 된다거나, 역으로 수도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생각이 개입된 판단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리라. 또 생각! 생각이다! 성직자의 삶이나 수도자의 삶이 신의 부르심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불편하고 어려워도 가야 할 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순수 자유 그 자체로 접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에 의한 성직 면허는 신의 부르심이 아닌 제도와 편리와 행정과 물질이라는 묘한 역학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거룩한 것이 못된다. 오히려 불결, 부정, 오염일 뿐이다.


성직자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룩함, 즉 온전함과 다른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순수한 그것’, ‘자유 그 자체’를 선택할 때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바로 그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는 외부적 요인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 그 자체 순수한 그것을 선택할 때 성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른 모든 것들을 놓아두고 오직 초월자만을 바라보고, 초월자만을 알기를 원하는 일념을 갖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올곧은 성직자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릇 거룩과 멀어지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직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떤 사람이라도 초월자 앞에 ‘있는 그대로’가 아닌, ‘순수 그것 자체’가 아닌 삶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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