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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종교의 난감함과 한계, 그리고 교황방문에 대한 만념(萬念)(1)

by anarchopists 2019. 10.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7/29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난감함과 한계, 그리고 교황방문에 대한 만념(萬念)(1)



종교 간 대화란 허상일까요? 각 종단의 수장(首長)들이 만나서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함께 사진촬영을 하는 것으로 종교 간 화해·이해·일치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까요? 필자는 시간이 갈수록 회의적이기만 합니다. 사실 그들만의 잔치 혹은 종교 간에 화합을 도모한다는 홍보용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지나친 생각일까요? 사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와 정교회, 개신교와 성공회, 개신교와 개신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심연들이 존재합니다. 전통이라는 것을 가장한 배타성을 띤 경계와 울타리들이 있어서 서로 남보듯 합니다. 이런 이유로, 타자적 이해,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를 배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게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수장들이 모인 것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협하지 않는 권력자들이 경계심을 풀고 우리는 그런 뜻이 없다는 하나의 형식상의 만남에 불과합니다.


가톨릭과 정교회가 개신교의 세례나 성직 안수(성직 자체에 대한 회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명분상으로 사도계승에 대한 단절이라는 이유에서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 한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사도계승이라는 명분이 과연, 교회사적으로 초월자의 현존과 함께 수장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는지를 살펴보면, 사도계승 자체가 반성과 회의의 시선에서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아무리 신학적 토대를 통해 정교한 체계로 변론을 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사는 명과 암이 공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로 봐야 합니다. 그럴 때 사도계승이 형식이 아니라 의미, 즉 그것이 갖고 있는 함의와 질료적·내용적 측면으로 본다면 각 종단의 세례와 성직은 나름대로 분명한 역사적·초월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황수위권을 인정하고 안 하고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교황은 내부에서조차도 때로는 ‘교종’(敎從)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있는 것이고, 성공회처럼 하나의 로마 교구를 담당하는 ‘주교’로 본다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마치 개신교의 노회장이나 지방회장처럼 말입니다. 물론 약간의 성격은 다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각 종단이 종교 간의 대화를 말할 때는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자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종단과 종단 사이의 색깔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내부에서조차도 종단의 색깔은 하나의 색깔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기실 하나의 색깔로 물들이고 길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강압이고 폭압이며 내부의 자유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 색깔이 공존해야 아름다운 그림이 나옵니다. 하나의 색깔로 그림을 그린 것보다 여러 가지 색깔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름답습니다. 자연도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 여러 색깔이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운 것처럼 말입니다. 아름다움은 자연을 닮습니다. 자연에서 비롯되고 자연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공부도, 종교의 연구나 대화도 결국 다양한 색깔 자체를 통해서 공존적 시각에서 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학자들이 말잔치이고 권력자들의 헛웃음, 가식적인 웃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교 간의 대화는 분명히 내면의 생각들, 내면의 신앙들을 서로 교류하고 화합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종교 간의 대화를 넘어서 종교 그 자체를 넘어설 수 있는 종교 포용성을 통한 종교 인정(투쟁)과 종교 동등성(성직자 동등성), 종교 평등성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적 교만에 사로잡히거나 자신의 종교가 가장 우월하다는 닫힌 생각이나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국의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는, 종교의 실체는 애초에 확정되거나 규정된 것이 아니라 학자의 연구 책상에 자료가 놓이고 분석되어질 때 종교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부처님도 자신을 교주로 삼지 말고 교단을 만들라고 한 것 적도 없는데, 불교교단을 만들어 불교 바깥의 중생들에 대해서는 배타성을 띠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진리를 배우는 것 말고 체제와 권위를 내세우고 종단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탐욕과 욕망에 사로잡힌 종교, 사업을 하는 종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야말로 신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김영국, “누가 진리의 반역자인가!”, 공동선, 2004년 7-8월, 117호, 72-74쪽).


“인간은 향락을 위한 모든 것을 생산해서 소비하게 합니다. 사람이 만일 실질적으로 나만이 아니고 딴 사람도 똑같이 살아가야지 하는 생각을 표준으로 하고 어떤 사람도 같이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비교적 살기 쉬울 것입니다. 곧 우리의 삶이 깊어질 것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19, 영원한 뱃길, 한길사, 1985, 376쪽) 함석헌의 “같이 살기” 철학은 삶의 기본적 토대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동등성을 위한 결행입니다. 같이 살기는 자신의 본능적 욕망은 말할 것도 없고 자아와 초자아까지도 넘어서야 합니다. 같이 산다는 것은 어느 때는 특정 개인의 본능 혹은 특정 집단의 본능이 강할 때는 살육과 전쟁을 불사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합리성은 본능과 초자아를 중재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타협을 하고, 종교적 초자아는 본능 앞에 무너져 버린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류 역사에 대한 허무로 결론을 맺을 수 있지만, 같이 산다는 궁극적 이상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본능적 욕망과 자아의 합리성은 애써 가려보고 종교적 초자아에 기대보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에서 성직자, 즉 교황을 비롯한 사제이든, 목사이든, 스님이든 그들의 자아를 내려놓지 않고서 텅 빈 초자아를 운운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종교(지도자)가 추구하는 바가 자기 비움일진대, 에고의 역사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아와 타자가 모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본능적 욕망이 발동하는 순간, 초자아는 타자를 재단하는 무서운 무기로 돌변하고 맙니다. 초자아는 자아를 넘어서는(super-ego)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럴 때 같이 살기는 유명무실해집니다. 2014년 8월 교황이 온다고 합니다. 교황의 방문이 수고스러운 한 종단의 행사로 그치지 않으려면, ‘갈라진 형제들’이라 명시하고 있는 교회문헌들조차도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포용성과 관용성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갈라짐’과 ‘형제들’에 의한 가톨릭의 트라우마는 갈라짐이라는 상처를 계속 끌어안지 못하고 형제라는 의미지향과 제도지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쩌면 교회사적 한계, 정치적 한계를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종교현상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종교 아닌 것이 없었고 종교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데올로기조차도 종교로 작용하고, 본능적 욕망을 토대로 한 문화와 문명조차도 종교화되었습니다. “이제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 규모로 보아서 나라로 말할 때에는 전쟁이 곧 욕심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서로의 이익을 다투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옛말에 이르는 대로 검소하게 알맞게 사는 것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바로 이 욕심이 현대인의 종교가 되었는데, 이 종교 아닌 종교가 현대인을 꽉 움켜쥐고 있는데, 신문, 연극장, 레스토랑, 다실, 이 모든 것이 이 종교에서 태어난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76-377쪽)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적 표현은 관습과 습관에 의해서 리추얼(ritual), 즉 종교(성)가 됩니다. 욕망이 고착화되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반복된 리추얼이 생겨나고, 그 리추얼은 개인과 사회적 성격의 종교적 징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서 징후는 외양과 맹목성이 아닙니다. 사제나 목사, 스님의 맹목성이 타자를 경직되고 고립시키는 리추얼이 된다면 타자에게는 폭력의 감정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정신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관점과 시선을 견지할 것인가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기 전, 그의 관점과 시선은 어디에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정신적 의지와 의미와 감각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너그러운·여유로운 시선을 보여주기 위한 방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사제의 언어적, 감각적 직관 능력도 보이기/보기로 일관한다면 방문은 그저 퍼포먼스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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