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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4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진실의 조건입니다!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2/24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 365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진실의 조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란 고난의 멍에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지우시는 짐을 지는 일이다. 십자가의 멍에다. 그리하여 순종을 배운다.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그 진실한 마음 때문에 천국에 가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멜 만한 자격이 있다. 고로 불러서 나를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 자는 어찌된 일인지 그리스도가 자기의 짐을 바꾸어 졌고 자기 몸은 대단히 가벼운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하는 데 대하여 “아멘”하게 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81-82쪽) [생각하며.. 2019. 11. 1.
그리스도인, 제3의 인종(trion genos)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3/22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제3의 인종(trion genos) “당시 그리스의 분류 용어를 사용하여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제3의 인종”(trion genos)인 셈이다. 이 용어는 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피타고라스 및 다른 왕과 현인의 독특한 위상을 서술하기 위해 피타고라스학파가 만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격을 그리스적이지도 않고 동시에 유대적이지도 않다고 가장 분명하고 잘 서술해 놓은 문헌이 바로 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인종”이며,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하고, “새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Jonathan Z. Smith, 장석만 옮김, 종교상상하기,.. 2019. 10. 31.
예수 사건: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현실과 관념의 공속성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4/30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예수 사건: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현실과 관념의 공속성 예수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의식 변화의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함석헌이 말하고 있듯이, 우주적인 새로운 사건이자 새로운 질서의 도래입니다. 예수 사건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분명히 존재 변화의 경험을 가지고 옵니다. 예수 사건은 존재 사건, 즉 있음의 사건이요 의미의 사건이지만 역사 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예수는 인류에게 낯선 타자요 동시에 타자가 아닙니다. 그는 역사-내-존재와 만나는 순간 타자가 아닙니다. 모든 존재와 더불어 있는 공속성(Zusammengehörigkeit, 共屬性) 혹은 공속관계의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공속성은 동.. 2019. 10. 30.
부활, 생의 의미의 영속적 발생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5/06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부활, 생의 의미의 영속적 발생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사건을 부정(否定)하고 무화(無化)시켜야만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건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시간 속에서 하나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어남(ereignis)이 있어야 합니다. 사건의 독특한 시간의식, 즉 역사성을 가지려면 계기적 순간(moment)으로서 현존해야 합니다. 특수한 일어남이 단순히 연속적인 현상이라면 그것을 사건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어남 혹은 사건의 발생은 눈으로(Auge) 바라봄, 눈으로 확인되는 시점(Augenblick), 눈앞에 현존함이라는 감각적·감성적 인식으로 다가오.. 2019. 10. 30.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처세술(에페 5,15-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8/20 01:47 ]에 발행한 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처세술(에페 5,15-20) 종교인들은 감히 자신을 신자라고 말합니다. “나는 개신교 신자입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나는 불교 신자입니다”, “나는 무슬림입니다”, “나는 ... 신자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들은 자신이 어떤 일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표명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님은 종교인들의 일반적인 정체성 발언을 몹시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 살지 못할 바에야 그냥 예수님, 하나님, 알라, 부처님, 공자님 등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 겸손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사도 .. 2019. 10. 22.
섬김의 아득한 거리, 현존의 부재(히브 5,1-1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10/21 22:38 ]에 발행한 글입니다. 섬김의 아득한 거리, 현존의 부재(히브 5,1-10) 섬긴다는 것의 의미, 섬김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에서 매우 많이 듣는 신앙행위 중에 하나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공경한다는 의미도 있고, 받들어 모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우에서도 통용되는 말이기도 하고, 신에게도 적용되는 신앙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섬긴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이 선행되지 않고 단지 신분상의 의무나 당위에 의해서 섬김이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사랑이 없이 사람을 섬기고 신을 받들어 모신다면, 이는 단지 형식적이고 빈 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르투어 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세상사람들에게 칭찬받.. 2019.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