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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처세술(에페 5,15-20)

by anarchopists 2019. 10.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8/20 01:47 ]에 발행한 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처세술(에페 5,15-20)

종교인들은 감히 자신을 신자라고 말합니다. “나는 개신교 신자입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나는 불교 신자입니다”, “나는 무슬림입니다”, “나는 ... 신자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들은 자신이 어떤 일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표명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님은 종교인들의 일반적인 정체성 발언을 몹시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 살지 못할 바에야 그냥 예수님, 하나님, 알라, 부처님, 공자님 등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 겸손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바로 그와 같은 신자들과는 다른 올바른 신앙의 처신법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깊이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The New English Bible에서는 ‘careful’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는 ‘주의 깊은’, ‘신중한’, ‘조심스러운’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면밀함, 신중함, 조심성, 사려 깊음이 있는 것일까?, 하고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종교인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 성찰적으로 접근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그저 각자가 믿고 있는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겸손을 다지는 길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종교인이 되어 진짜배기 종교생활을 해야 한다면 말입니다.

횔덜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근심하고 섬기는 일은 시인들에게 맡겨진 일이로다! 우리가 몸 바쳐야 할 이, 바로 드높으신 분이니 하여 더 가까이, 언제나 새롭게 찬미되어 친밀해진 마음 그분을 들어 알 수가 있기 위함이도다”(<시인의 사명> 중에서). 시인이 만능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시인은 세계를 해석하고 용기 있게 살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의 처신술인 셈입니다. 그러면 종교인, 그리스도인의 처신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뜻, 주님의 의지(will)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되레 자신이 자청해서 시인이 되려고 합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시인의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시어들로 넘쳐 나는 교회가 된다면, 메마른 교회가 아니라 감성이 풍부한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말로 섬기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 입의 감각적인 본능은 맛을 추구하고 동시에 말을 쏟아내는 역할을 하는 이성적 창구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자칫 감각적인 본능과 이성의 창구를 혼동하면 감각적인 본능에만 치중해서 교회 공동체를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감각적인 본능의 입으로는 아무리 서로를 보듬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때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성이 있는 이성적인 말은 교회를 세우고 건강하고 건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성적인 말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기를 원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신앙적 처신법은 무엇인가요?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정신, 하나님의 호흡에 의해서 살려고 부단히 애를 쓰려고 할 때 그분과 가까워질 수 있고 동시에 신자들과도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정신으로 가득해질수록 교회가 거룩해지고 생기가 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정신은 내가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이 내게 오도록 열어놓아야 합니다. 횔덜린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넓은 세계에서의 그대들 쉼 없는 행동들이여! 그대들 운명의 나날이며 격동하는 나날들이여, 신이 말없이 생각에 잠겨, 거대한 말들이 분노에 취해 그대를 옮겨다줄 곳으로 조정하고 있을 때, 우리가 그대들에게 입 다물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없으면서 들려주는 말입니다. 없는 듯하기 때문에 말들이 분노합니다. 말들이 날 뛰기 때문에 공동체가 제대로 서로 신앙적인 처신을 못하고 흩어집니다. 말이 분노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말이 분노한 듯이 쏟아냅니다. 그것은 거룩한 정신의 말이 아닙니다. 분노한 말, 그것도 무지막지한 말들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그 말에 짓눌려 말을 하지 못합니다. 말을 하더라도 맑은 말이 아닙니다. 맘에서 나는 말도 아닌 목에서 나오는 소리일 뿐입니다. 거룩한 정신을 받은 사람, 거룩한 정신에 의해서 살아가려고 무진 애를 쓰는 사람은 말이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분노의 말에 취하다 못해 입을 열어서 그 소리를 내뱉을 때, 그는 다만 침묵을 할 뿐 동일한 감정적 본능과 욕구에 의해서 발언하지 않습니다.

종교인이 종교인답기 위한 처신법 중의 또 다른 하나는 '시편과 성가와 영적인 노래'를 모두 같이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도 입을 도구로 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노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진정한 마음으로(in your hearts) 해야 합니다. 횔덜린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 변함없이 쉬고 있는 연륜의 화음이 울릴 때 마치 거장의 아이 기분 내키는 대로 태연히 축복받은 현금을 장난삼아 건드려 켜듯이 그렇게 울려야 하겠는가? 그 때문에 그대 시인이여! 동양의 예언자들과 그리스의 노래를 들었으며 근래에는 천둥소리를 들었던 것인가? 그리하여 정신을 멋대로 이용하고, 착한 정신의 현존을 우롱하는 가운데 지나쳐버리고, 순진한 정신을 가차 없이 부정하며, 사로잡힌 들짐승처럼 그 정신을 놀이 삼아 흥정하는 것인가?” 종교적인 음악이 그렇듯이, 시편이나 성가와 영적인 노래는 신에게 경건한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가볍거나 유치한 마음의 울림이 아닙니다. 악기와 인간의 목소리가 한데 어울려 거룩한 정신 그 자체를 불러내고 그 거룩한 정신을 받아들이는 작용이 노래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의 노래는 거룩한 정신을 우롱하거나 현존의 의미마저 퇴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로가 내세우는 종교인의 올바른 처신법은 '감사'입니다. 고마움(Danken)의 증여는 그것을 알게 해주고 느끼게 해준 존재에 대한 생각(denken)이 없으면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이 먼저이고 고마움이 나중입니다. 고마움을 느끼도록 한 주체에 대한 생각이 없고 감정이 없는데 어떻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을까요? 횔덜린은 또 이렇게 나무랍니다. “모든 신적인 것 너무도 오랫동안 값싸게 이용되었고 모든 천상적인 힘 소모하면서 그 선한 힘 농 삼아 감사함도 없이 교활한 인간들은 헛되이 써버리고 있도다... 너무도 현명한 것 그래도 좋은 일이다. 우리의 감사가 그를 알고 있을 따름, 그러나 시인 홀로 감사함 담기 쉽지 않아 기꺼이 다른 이들과 어울리도다. 하여 그가 이해를 다른 이들이 돕도록. 그러나 시인 어쩔 수 없이 외롭게 신 앞에 서야 할지라도 두려움 없도다. 단순함이 그를 보호해주며 그 어떤 무기도 지략도 필요치 않도다. 신이 없음이 도울 때까지는.”

고마움이 없는 신자들은 신을 값싸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자신이 신자라고 생각한다면, 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신에 대한 고마움 정도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칫 우리의 고마움이 사라지게 되면 고마움이라는 감정, 이성적 증여가 우리 대신 신에게 자신을 알리고 말 것입니다. 어떤 시어나 미사여구로도 고마움을 표현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입니다. 오죽하면 시인도 감사를 다 담아낼 수 없다고 말을 했을까요? 언어로 고마움을 다 담아낼 수 없으니 그저 하나님 앞에 외롭게 서 있을 뿐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고마움의 증여, 고마운 감정의 교환이 존재하지 않으면 삭막합니다. 그 사람 앞에서 외롭고 고독해집니다. 마른 감정만이 남아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종교인들의 처신법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이 감사입니다. 고마움을 떠올리고 느끼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에 대해서 먼저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한 것처럼, 매일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그 고마운 대상을 사유해야 고마운 마음이 절로 생기는 법입니다. 특히 하나님께는 말입니다. 만일 그것도 난감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수없이 되뇌십시오. 그러면 내가 왜 하나님께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가, 그리고 내가 왜 종교인으로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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