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

[제3강] 함석헌의 역사서술-성서적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by anarchopists 2020. 2.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8 08:20]에 발행한 글입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저술과 수정

“조선역사”는 김교신이 주필로 있던 《聖書朝鮮》의 1934년 2월호(제61호)부터 1935년 12월호(제83호)까지 2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조선역사”는 동경고등사범학교 文科 一部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1928년 귀국하여 모교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함석헌이 ‘약혼 받은 거러지 같은 심정’이었으나, ‘세 가지 작대기 같은 생각’(믿자는 의지, 나라에 대한 사랑, 과학적이려는 양심)으로 저술한 것이다.

당초 “조선역사”는 그가 성서조선 겨울집회에서 1주일 동안 ‘겨울날 문을 닫은 골방 안에서 여남은 되는 믿음의 동지들과 무릎을 걷고 앉거나 머리를 맞대고 기도로서 한 이야기’이다. 성서강습회라고도 불린 이 집회는 중학 졸업 정도 이상자를 참여 자격으로 제한하였다. 그가 “조선역사”를 강의한 집회는 두 번째인 ‘오류동집회’로서, 1932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7일간 개최되었다.

강사와 강좌는 김교신(金敎臣;복음서연구․조선지리), 유동석(柳錫東, 예언서연구), 양능점(楊能漸, 구약성서의 역사적 가치), 함석헌(조선역사), 이덕봉(李德鳳, 성서식물학)이었으며, 기도회는 송두용(宋斗用)이, 가정 예배는 함석헌이 사회를 맡았다. “조선역사”는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3시간씩 三講(12/31, 1/1, 1/2)이 배정되었다. 수강자들은 이 강좌를 주먹에 땀을 쥐며 경청하였고, ‘조선 첫째의 조선사’, ‘세계 제일의 조선역사 강좌’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은 한계를 아쉬워하였다.



“ … 만3시간(滿三時間)의 연속강의이엇스나 강자청자(講者聽者)가 모두 일순간(一瞬間)을 보낸 것처럼 시간이 흐름을 애석하엿다. 조선역사 반만년에 역사도 길엇거니와 사가도 많엇다. 마는 조선 백성에게 사관(史觀)을 준 이가 없엇다. 이날에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境)에 일보를 내디디어 반만년사의 사관을 제시하엿건만 이천만중(二千萬中)에 이것을 들은 자 이십명(二十名)에 미만(未滿)하고 이것을 읽을 자 이백인(二百人)에 불급(不及)하니 무슨 췌언(贅言)을 첨서(添書)할 필요있으랴. 오직 일이 기이(奇異)함을 심비(心碑)에 명기(銘記)할 뿐이엇다. …”

이 같은 한계는 함석헌 자신도 독자가 많을 때에도 2백 명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그는 “조선역사”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본래 이것은 나 홀로의 한숨이며 돌아봄이요, 알아주는 친구에게 하는 위로요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믿음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 …”

“조선역사”는 집회 말미의 ‘감화회’(感話會0 때 출판을 하기로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함석헌이 오산학교 수업시간 이외에 원고의 정리에 진력한 끝에 《성서조선聖書朝鮮》에 연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 … 지도교수가 있는 대학도 아니지, 도서관도 참고서도 없는 시골인 오산이지, 자료라고는 중등학교 교과서와 보통 돌아다니는 몇 권의 참고서를 가지고 나는 내 머리와 가슴과 씨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파리한 염소 모양으로 나는 씹는 것이 일이었다. 지푸라기 같은 다 뜯어먹고 남은 생선 뼈다귀 같은, 일본 사람이 쓴 꼬부려 댄 모욕적인, 또 우리나라 사람이 쓴 과장된 사실의 나열을 나는 씹고 또 씹어 거기서 새끼를 먹일 수 있는 젖을 내보자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주 없는 것을 한도 많이 하였고, 공부 못한 것을 후회도 많이 하였다. 또 30년 전 일이다. 문장을 다듬어 보자는 어리석은 생각도 아직 있었고, 더구나 일본시대에 말의 자유가 없는 때라 당당히 할 말도 많이 스스로 깎아야 하는 때이므로 더욱 어려웠다. …”

“조선역사”가 연재되며 독자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김교신은 1934년 3월 어느 동경 유학생으로부터 ‘제일 좋은’ 조선역사 책을 소개해 달라는 서신을 받았다. 그 때는 “조선역사”가 불과 2회 연재된 때이나, 그는 주저 없이 “조선역사”를 천지신명 앞에도 부끄럼 없이 추천할 수 있음을 확언하며 추천할 정도였다.

연재가 완료 된 후 “조선역사”는 단행본 출판이 계획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일제 강점기하에서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역사”는 노평구(盧平九)가 간행하던 《성서연구聖書硏究》에 재록되었고, 1950년 4월 (성광문화사)星光文化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내용은 일제의 검열로 삭제된 기사가 복원되고 해방 이후의 내용도 첨가되었다.

1954년에는 증보 재판이 간행되었고, 3판부터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제하여 간행하였다. 제4판은 1965년 제일출판사에서 간행되었는데, 여기에 함석헌이 쓴 「네째판에 부치는 말」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까지의 전말을 잘 알려준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후 삼중당, 한길사 등에서 속간하였다.(박걸순)

박걸순
박걸순교수는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
박걸순교수는 독립기념관 학예실장을 거쳐 지금 충복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계신다.

위글은 지난 해 함석헌교실에서 한 강의를 그대로 옮겨실었다. /함석헌평화포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