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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

[이치석 제1강] 함석헌을 왜 공교육을 혁명가로 보는가

by anarchopists 2020. 1. 3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3/10 09:36]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서거 20주기, 간디서거61주기 추모학술모임 강연내용-이치석]

어머니의 목걸이 찾기
-함석헌을 왜 공교육 혁명가로 보는가?-


어머니의 목걸이 찾기
솔직히 처음에 준비한 제목은 “국가주의와 싸우는 함석헌의 공교육 이념”이고, 그 내용은 「고난과 교육」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삼웅 선생님께서 마침 “독재정부와 싸우는 함석헌의 저항정신”이라는 원고를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우연히 두 사람의 제목이 “○○○○와 싸우는 ○○○의 ○○○”으로 비슷한 걸 알아채고 중간에 다소 오락가락 고민하다가 결국 “함석헌을 왜 공교육 혁명가로 보는가?”라는 제목과 내용으로 모두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서 부랴부랴 써놓고 나서 읽어보니 전부 불태워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때 새삼스럽게 함선생님의 “씨알”이란 인용문이 다시 눈에 딱 들어왔습니다. 『씨알의 소리』1970년 4월 창간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미 적혀있는 원고 대신 그 “씨알” 구절을 먼저 읽고 공교육 혁명가 함석헌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어머니를 깨우려면 어머니의 말로 해야지, 말은 생명입니다. 말은 사랑입니다. 그래 나는 모두들 미쓰 미쓰 하니 한국엔 아가씨 없다, 미국놈 다 줘버렸다, 합니다. 국민(國民), 신민(臣民)하면서 몇 천 년 남의 살림을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조상의 피와 뼈가 쌓여서 된 이 땅이 왼통 엉겅퀴 찔레 밭이 돼 버렸습니다. 이제 그 엉겅퀴 밭에 어디 내 어머니가 주었던 목걸이가 떨어졌나 찾노라면 목걸이만이 아니라 어머니가 살아납니다. 사실 목걸이는 어머니의 표시 밖에 다른 것 아니 됩니다. 어머니의 몸은 죽겠지만 어머니의 혼은 그 물려준 목걸이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것을 경히 여기겠습니까? 우리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우리의 「나」를 찾기 위해 잃었던 말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 문장은 함석헌의 공교육혁명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먼저 ‘몇 천 년 남의 살림’ 때문에 ‘이 땅이 왼통 엉겅퀴 찔레 밭’으로 변했다는 말부터 그렇습니다. 그 밭을 갈아엎어서 원래의 비옥한 땅으로 다시 돌려놓자는 것은 야만에 대한 혁명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땅을 갈아엎기 전에 먼저 어머니의 목걸이부터 찾아야 합니다. 그 목걸이는 어머니의 혼이고, 그 땅은 어머니의 혼이 숨 쉬던 곳입니다. 그냥 갈아엎어 버려서 어머니의 목걸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면, 엉겅퀴 찔레 밭보다 더 삭막한 땅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함석헌의 혁명론은 순서상 어머니의 혼을 만나고 그 다음에 땅을 갈아엎는 일입니다. 그 어머니를 깨우기만 하면, 그 잡초 밭을 예전에 어머니의 혼과 손으로 일구던 비옥한 땅으로 다시 돌려놓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미 어머니의 목걸이를 찾는 과정에서 그 일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폭력혁명을 강조합니다.

“혁명은 그 변할 수 없는 것이 잊어지고 잃어지고 가리워진 것을 도로 찾는 일이다.……혁명을 못하는 종교처럼 고린내 나는 것이 없지만, 또 신앙을 가지지 못한 혁명처럼 사납고 무서운 것은 없다. 공산당이 무엇인가? 종교 없는 혁명 아닌가? (“비폭력혁명” 『전집』2권)


사실 비폭력혁명은 간단히 불을 놓아서 엉겅퀴 찔레들을 태워버리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선포식을 합니다. 바로 『씨의 소리』를 창간한 일입니다. 그때 자기 일생의 목에 걸었던 목걸이가 씨이란 말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잡지를 자기교육기구라고 정의합니다. 그의 혁명방식은 비폭력이요 교육적입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목걸이 찾기이자 어머니의 혼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엉겅퀴 찔레 밭에서 찾아야 할 어머니의 목걸이처럼, 그 꿈은 불확실하며 영원한 미래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도리어 그 불확실성을 전제로 불확실에 대비하는 훈련입니다. 그 방법을 함석헌은 ‘씨알’이란 말의 발명으로 보여줍니다. 씨알보다 더 좋은 말이 있거든 고칠 셈 치고 우선 써본다고 했습니다. 씨알혁명의 꿈이 거기에 있습니다.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말대로, 모든 사회는 그 자체의 정초석이 되는 명칭 위에 정착하게 마련일 테니까요.

아울러 우리는 함석헌의 씨알을 공교육 혁명과 결코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실제로 어머니의 말로 어머니를 깨우는 방법은 교육혁명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목걸이 찾기라고 해도 좋습니다. 어머니의 혼을 만나게 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때 잃어버린 어머니의 목걸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또 하나의 목걸이 찾기를 함석헌의 공교육 혁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전교조의 주장처럼, 공교육을 정상화한다거나 공교육으로 혁명을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공교육제도도 엉겅퀴 찔레 밭처럼 썩을 대로 썩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대한민국의 모든 학부모는 교육전문가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현재 인구에 회자되는 공교육은 말하는 사람마다 차이가 납니다. 까닭에 실제로 공교육이란 무엇인지 올바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가령 이명박 정부의 공교육 정상화는 전교조의 공교육 정상화와 다릅니다. 즉 공교육 정상화는 반대의 일치를 이룹니다. 역사적으로 반대의 일치 현상은 대공위기에 나타납니다. 그 분열의 심리구조에는 낡은 행동의 가치와 유형이 폐기를 되기를 바라는 경향을 내장합니다.


함석헌은 공교육이란 말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공교육의 정상화를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예 학교교육 자체를 전면 부정합니다. 함석헌의 비판은 어떤 교육운동 단체의 주장보다 신랄합니다.

공장이지 학교가 아니다. 거기서는 아동이라는 원료를 넣고 교사라는 기술직공이 교수라는 기계작업을 하면 다수의 제품이 나온다. 그러면 일정한 자격이 있어서 거기 맞으면 상품으로 나가고 맞지 않는 것은 아낌없이 내버림을 당한다. 공장주는 채산이 목적이지 그 개체의 운명은 문제로 삼지 않는다. 그런데 해방 후 이것도 격화되었다.” (이하 “새 교육” 『전집』2권)(이치석, 내일 계속됩니다.)

이치석 선생님은
함석헌의 역사관
* 이치석 선생님은, 프랑스 아미앙대학교 역사학 박사과정(D.E.A)수료하였으며, 함석헌의 "씨알교육"을 우리나라에 보급하려 애써오셨다. 현재"씨알의 소리"편집위원으로 계신다

* 저서로는『씨알 함석헌평전』『전쟁과 학교』가 있고, 공저로는『황국신민화교육과 초등학교제』외 다수가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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