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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

[제1강]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머리말

by anarchopists 2020. 2.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6 14:29]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를 중심으로

Ⅰ. 머리글 - 함석헌이 역사가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함석헌(1901~1989)은 20세기 한국의 행동하는 지성과 시대적 양심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씨알’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걸은 분이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족적을 남겼다. 그는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교육을 하려다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 되고 사상가도 못 되고 …”

983년 “함석헌전집” 편찬 시 편찬위원 일동 명의로 된 간행사에서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정의하는 것은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에 이름 붙이기와 같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금강산의 만물상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이 함석헌도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학자이기도 하고 학자가 아니기도 하고, 문인이면서 문인이 아니며, 종교인이면서 종교인이 아니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역사 저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 … 학문에 뜻을 두고 꾸준히 배우고 꾸준히 가르치는 이를 학자라고 한다면, 함석헌은 학자라고 불리는 것이 가장 어울린다. 동경 고등사범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기독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붓을 들어 쓰기 시작했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나, 이미 판을 거듭하여 널리 읽혀져 온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역사에 뜻을 두는 사람들이 한번은 꼭 읽어야 할 책임에 틀림없다. … 연구소를 차리거나 연구실에 들어앉아 조용히 학문 연구에 몰두할 처지나 형편도 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학자 생활은 30대, 40대에 이미 끝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겠다. …”

함석헌에 관한 평가 가운데 그가 역사가인가 아닌가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찍이 함석헌의 한국사관을 주목하여 그를 ‘자신의 사관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우리의 역사를 사료의 창고가 아닌 살아 펄펄 뛰는 역사로 만든 분’이라고 평가한 견해가 있었다. 즉, 함석헌은 기독교사관에 입각하여 있으면서도 그 저변에 민중이 있어 민족사의 훈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하 “조선역사”로 약칭)가 일제하에 통사의 저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 견주어 개성적인 사관에 의한 통사로서 사학사적 의미가 평가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함석헌의 고난사관이 역사를 보는 관점과 시각에서 볼 때 ‘토인비와 놀랄 만큼 거의 일치’한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의 사풍이 계승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조선역사”를 한국사학사를 뛰어 넘어 ‘20세기 세계사학사에서 선구자적 위치’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는 견해까지 제기되었다. 근래에는 함석헌의 역사인식과 한국사 이해를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연계하여 이해하고 그를 ‘1930년대의 조선사회가 배출했던 역사학자로 비정’하는 논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함석헌의 사관은 놀란만치 토인비와 일치한다.

그러나 함석헌과 “조선역사”를 한국사학사의 범주에서 논의하는 것에 대해 주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까닭은 종교적 성격이 과도하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도 한국사학사를 공부하며 “조선역사”를 접하였으나, 성서적 입장에서 우리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어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못한 바 있다. 그것은 이른바 기독교사관, 종교사관, 섭리사관, 종말사관, 고난사관 등으로 평가되는 그의 사관이 한국사 서술과 인식의 관점으로서 타당한가, 1930년대에 분화 발전한 다양한 사학으로 유형화 할 수 있는가 하는데 대한 회의 때문이었는데, 지금도 그 판단은 내리지 못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을 논의하는 것은 그가 역사가인가 아닌가의 시비와는 구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역사가로 평가되든 아니든 그의 저술이 당대에 영향을 끼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기백이 어린 시절 “조선역사”를 읽고 받은 감동의 회술은 그 영향을 잘 보여준다.

“ … 또 하나 제가 큰 영향을 받은 것은 함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입니다. … 이 책은 기독교적인 입장이지만 실제적인 내용은 도덕사관입니다. 거기서 제일 감동적으로 읽은 것은 사육신과 임경업입니다. 함선생은 민족적인 비극이랄까 하는 것을 사육신과 임경업에서 상징적으로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육신 문제, 임경업 문제 이런 것들에 대해 진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 결국 하느님에 의한 인류의 구원이 고난의 상징과 같은 우리 민족에게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 함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습니다. …”

함석헌이 역사가인가 아닌가의 논의는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역사저술과 인식이 당시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규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三國遺事”가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체재조차 정비되지 못한 채 ‘一餘業 一閑事’로 저술된 것이고 승려인 一然이 자신의 관심 분야를 정리한 불교문화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三國遺事”가 “三國史記”와 동렬선상에서 고대사 사료로서 평가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기에서 조명하고자 하는 시간적 공간은 1930년대이다. 따라서 그가 1934~35년간 “성서조선”에 연재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검토의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1930년대 한국사학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가 올바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1950년에 이를 책으로 발간하며 ‘고치지도 깁지도’ 아니하였는데, 그는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한 바 있다.

“ … 고치지도 깊지도 아니하는 데는 또 까닭이 하나 있기도 하다. 그것은 이 고난의 역사는 이대로 그 잡혀 갇혔던 때의 한 가지 예술품이니, 그 모양대로 두어서 고난을 말하게 하자는 것이다. 뻐젓이 내놓지 못한 것도 그때의 그 空氣니 그대로 두자는 것이요, 연구가 찬찬치 못하고 말하는 법이 거칠은 것도 그 고난의 곡조 아뢰는 데 뽑힌 깨어진 악기의 저 제대로의 꼴이니 그냥 두자는 것이다. …”

박걸순교수는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
박걸순교수는 독립기념관 학예실장을 거쳐 지금 충복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계신다.

위글은 지난 해 함석헌교실에서 한 강의를 그대로 옮겨실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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