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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교육

[제2강]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1930년대 한국사학

by anarchopists 2020. 2.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1/27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Ⅱ. 1930년대의 한국사학

1930년대 민족주의 사학과 사회경제사학

1930년대는 일제의 만주침략(1931)과 이후 15년 동안 계속된 침략전쟁의 수행, 신사참배와 황국신민화 강요, 국가총동원법(1938) 이후 각종 수탈 등 파쇼적 지배체제가 강화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1920년대 이래의 소작인,노동자 투쟁이 본격화 되었고, 공산주의운동도 더욱 확산되어 민족 내부에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문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일제의 강권통치는 더욱 기승을 부렸으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역사연구를 부단히 진행하였다. 1930년대의 한국사 연구는 신채호(申采浩)의 투옥(1928)과 순국(1936) 이후 국외에서의 활동은 거의 중단되고 국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주목하여야 할 것은 통사류의 저술이 거의 중단되고 민족주의사학, 사회경제사학, 실증사학으로 분화,발전 하는 양상을 보이고, 또한 안재홍(安在鴻), 정인보(鄭寅普), 문일평(文一平) 등을 중심으로 하여 이른바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이 전개되고 있는 점이다.

함석헌이 “조선역사”를 저술했던 시기를 전후하여 한국사학계는 일대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먼저 백남운(白南雲)의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 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 1937) 및 이청원(李淸源)의 “조선역사독본”(朝鮮歷史讀本, 1937)이 발표되며 한국사를 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해석하고자 하는 사회경제사학이 등장하였다. 백남운은 민족주의사학을 신비적, 감상적이라 비판하였고 실증사학의 문헌고증적 사풍도 비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식민사학을 인류사회 발전의 역사적 법칙의 공통점을 거부한 ‘반동적’ 형태로서, 독점적이고 정치적인 ‘특수사관’이라고 배격하였다. 그들은 사회경제사학이 ‘유일한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한국사도 세계사의 일원론적인 역사발전법칙과 동궤적 발전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회경제사학은 새로운 역사연구 방법론을 도입하는 한편, 다른 사학의 경향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고, 특히 일제의 허구적인 정체성 이론을 극복하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유럽사가 기준이 된 유물사관 공식만을 유일한 과학적 방법이라는 배타적 태도로 이를 무리하게 한국사에 대입시켜 다원성을 무시하였고, 생산력 발전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소홀한 채 한국사의 실제와 일치되지 않는 허구적 결론을 도출한 한계가 지적된다. 따라서 비록 문제의식은 정당하다 하더라도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공식주의’로 비판받을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가 “조선역사”를 저술하여 발표를 시작한 1934년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조직되어 이른바 실증사학을 주도하였다. 진단학회는 일본인의 조선 연구에 자극을 받아 조선인에 의한 조선 문화의 연구를 지향하였다. 당시 언론이 진단학회의 창립을 ‘불후의 성사’(不朽의 盛事)라 극찬하며 장래를 촉망한 것도 결국은 일본인에 의해 한국문화가 연구되어 온 현실적 반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랑케류의 실증사학자’들은 이 학파의 학풍으로 말미암아 민족주의 사학자와 같은 시론적 성격의 역사서술은 하지 않고, 다만 식민지 통치하에서 민족사를 연구하는 것 자체를 민족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실증사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로부터 역사의 효용성과 교훈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였고, 유물론 사가들로부터도 사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실증사학 자체를 사관이 전제된 역사연구 방법론으로서 별도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없으며, 실증이 랑케사학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하나의 학풍, 사풍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이 식민지 권력에 무관심 혹은 동참하거나 의도적으로 피해간 것이라면 조선 후기 고증학이 세도정권을 피해갔던 것과 같은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역사학의 일반적이고 필수적 기초인 사실의 실증을 역사연구의 방법론과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 한구사학의 특징은 한국사학의 분화 발전이다.
실증사학자들이 일제하에서 근대사학의 방법으로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일본인 연구자들과의 경쟁적 연구를 통해서 많은 수확을 거둔 사실은 평가되어야 한다. 사실 그들은 사료의 비판을 통해 한국사 연구와 이해에 기초가 되는 사료와 사실의 확보에 있어 성공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식민사학과 대립이 아니라 그 속에서 공존을 모색하거나, 개별적 사실에 지나친 천착과 정치사 위주의 연구경향으로 사회전반에 걸친 현상들과 연계가 소홀한 점은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현대 한국사학이 혼미하게 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한 어두운 면이 지적됨에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학의 유형이 분화 발전한 것은 1930년대 한국사학의 특징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당시 민족주의 계열을 중심으로 전개된 조선학운동도 함석헌이 역사 저술을 하게 된 시대적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학운동은 1934년 다산 서거 99주기 기념강연회에서 안재홍이 정인보와 함께 제창한 것이다. 안재홍은 ‘조선학’의 두 가지 방법론을 제시한 바 ① 현대 현실에 卽한 통계적ㆍ수자적인 사회동태적(社會動態的) 방면, ② 역사적ㆍ전통적 문화특수(文化特殊) 경향의 방면으로, 이 모두 엄정한 과학적 조사연구의 대상이라 하였다. 이는 그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조선학의 현재적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문일평은 조선학을 광의와 협의의 개념으로 구분하되, 광의의 조선연구 대상 전체가 아니라 협의의 개념인 조선사와 조선 문학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조선학운동에 대해 유물론 사가들은 ‘소부르주아적 배타주의, 반동적 보수주의, 감상적 복고주의’라 비판하였으나, 안재홍 등은 오히려 진보적․약진적․세계적으로 되는 것이라 반박하며 이 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결국 조선학운동은 두 가지 목적 하에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신간회 해소 이후 지향점을 상실한 민족주의 계열이 민족운동의 돌파구로서 모색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에 대응책으로 강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30년대는 국학민족주의시대라 일컬을 만큼 국학이 민족운동을 선도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녔던 시대이다. 당시 한국사학은 민족주의사학, 사회경제사학, 실증사학 등으로 유형이 분화 발전하였고, 조선학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조선역사”는 이 같은 배경에서 잉태된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박걸순)
박걸순
박걸순교수는
함석헌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
박걸순교수는 독립기념관 학예실장을 거쳐 지금 충복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계신다.

위글은 지난 해 함석헌교실에서 한 강의를 그대로 옮겨실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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