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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9

성서로운 삶을 향한 존재의 이해: 니체와 에크하르트로 읽는 성서 책소개 니체와 에크하르트 두 철학자의 시선으로 성서를 바라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자 모험이요 저항의 몸-짓(poiesis)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두 사람을 해석학의 도구로 삼아 성서를 봄으로써 새로운 신앙의 쇄신을 갈망하는 필자의 포이에시스(창작적 언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작금의 종교는 그 본래의 올바른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매너리즘과 아비투스에 빠져 값싼 신앙언어만 생산함으로써 종교의 언어, 경전의 언어가 높은 이상적 가치,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현실에서 새로운 저항의 언어와 사유를 가능케 하고자 한 저자의 성서해석학의 포이에시스적 시론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할 것이다. 목차 말을 열면서 종교적 현실언어의 종언과 종교경전의 해체적 해석 1장 종교의 순수한 시원을 향한.. 2020. 10. 8.
신앙이 피곤할 때(languor; fatigatio) 신앙이 피곤할 때(languor; fatigatio) 신앙은 해방입니다! “인격을 수양하지 못하는 것(덕을 닦지 못함),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는 것, 옳은 일(의로움)을 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다”(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 3장). 공자의 말입니다. 이처럼 신앙도 말이 아니라 수양이고 행동입니다. 덕행을 닦고 옳지 않음(不善)을 피하는 것이 신앙인의 행위(opus), 신심 행위(opera pia)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고 따르고(Patrem invocatis) 하는 모든 행위에는 부르는 자의 몫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자신을 어떤 호칭으로 부르도록 했다는 것 또한 스스로 그러한 위치에.. 2020. 4. 27.
시들지 않는 구원이여 시들지 않는 구원이여 믿음이 있는 사람은 희망을 봅니다! 사람들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자그마한 희망(spas, spem)이라도 찾으려고 합니다. 희망에 작은 것과 큰 것을 나눈다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희망은 상대적입니다. 절망적인 죽음의 상황에서 보면 작은 것도 큰 희망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희망을 품으면서 그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상적으로 보이는 것만이 희망의 실체인 것처럼 믿어버립니다. 희망이 갖는 의미와 그 영원성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시적인 나의 절망적 상황만을 타개한다면 희망의 구실을 다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희망은 어떤 최초의 존재가 그의 모범에 따라서 주는 결과로서 많은.. 2020. 4. 20.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8/0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강론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1. 설교(강론)는 해석학이다! 교회나 성당에서 설교자(혹은 강론자)가 성서를 현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풀이를 해준다는 것[해석]은 지난한 일이다. 게다가 성서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신이 인간에게 한 말, 즉 계시라는 점에서 설교자로 하여금 더 곤혹스럽게 만든다. 행간과 행간, 자간과 자간 사이를 읽어내는 것은 하나의 능숙한 기교(techne)와 기술(art)이 필요하다. 2천년을 훌쩍 넘긴 고대 문서에는 신이 인간에게 말하고자 한 자신의 이야기가 스며있기 때문에 문자로만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설교자나 주석가는 당혹스럽다. 하지만 성서는 .. 2019. 12. 16.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8/0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4. 설득과 소통을 위한 설교자(강론자)의 에토스 지금까지 우리는 수사학의 역사나 형식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수사학은 언어를 통한 논증과 진실성의 전달, 설득 등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들어 그리스도교 신학의 성서해석학이나 설교 형식에서 수사학이라는 학문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신학에서 성서해석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나, 수사학이라는 어떤 일부분의 요소만 차용하여 해석학이나 설교에 접합하겠다는 것은 매우 피상적 발상이다. 그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완전히 소화가 되고 훈련이 되어서 그 본래적인 .. 2019. 12. 16.
함석헌이 본 종교의 행복, 종교는 행복한가?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1/21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이 본 종교의 행복, 종교는 행복한가? 연말연시가 되면 종교(특히 교회)는 이른바 ‘특별 (저녁)기도회’ 혹은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기도 총력전에 나선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온갖 생각들이 교차가 된다. 기도를 하는데 ‘특별히’하는 기도라는 것이 있는가? ‘특별기도회’가 있으면 ‘일반기도회’가 있어야 하는가? 특별기도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물론 연말연시를 맞이해서 신과의 소통을 보다 가까이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다잡아 보자는 취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거기에도 마치 20세기 초의 스탈린이나 레닌 집권 이후에 나타났던 노동자들의 경쟁을 부추기고 대중을 통제하던 ‘성과급’이나 그것을 이어받은 .. 2019. 11. 25.
초월자의 발화와 종교인의 이성적 신앙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7/16 01:50]에 발행한 글입니다. 초월자의 발화와 종교인의 이성적 신앙 성서는 초월자의 언어로 되어 있는 일종의 암호와도 같다. 그것은 풀어 밝혀야 이해될 수 있는 언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은 초월자의 언어를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한 인식과 행위의 기능으로서 작용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초월자의 언어 자체와 초월자의 언어로부터 유출(emanation)되는 것 사이의 구분, 즉 무시간적인 영원성이냐 아니면 시간적 유한성이냐를 식별하는 일이다. 인간의 믿음은 초월자의 언어를 깨닫고 그 언어를 자신의 삶의 근간으로 삼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그 언어가 초월자 자체인지 아니면 초월자로부터 유출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 2019. 11. 3.
근원적인 문자를 찾기 위한 해석학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10/23 03:17]에 발행한 글입니다. 근원적인 문자를 찾기 위한 해석학 근원적인 문자(Urschrift)는 주체의 행위 이전에 주어진 시원적 사유의 가능적 표현이다. 자크 데리다(J. Derrida)가 “모든 표현 수단들은 기본적으로 문자”라고 말한 것은 신에 대한 표현조차도 인간의 언어 전달 수단인 문자에 있음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문자로 이루어진 성서의 속뜻을 읽어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경을 읽을 때는 글자에 붙잡히지 말고 그 산 속 뜻을 읽어내도록 끊임없는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7쪽). 문자는 기호로서 일정한 대상이나 의미를 지시하고 있다. 문자는 의미의 표현수단이고 .. 2019. 11. 2.
하느님을 닮는 삶의 법칙들(에페 4,25-5,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8/13 00:24]에 발행한 글입니다. 하느님을 닮는 삶의 법칙들(에페 4,25-5,2)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법칙들이 있는 듯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되면 철이 든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판별하는 눈이 뜨였다는 말인데, 다른 말로는 처세를 잘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말로도 이해가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사람들이 어떤 감정과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서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을 잘 안다면 처신하기가 그만큼 수월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적 처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하느님의 성품 닮기라는 대명제가 깔려 있습니다.. 2019.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