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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하느님을 닮는 삶의 법칙들(에페 4,25-5,2)

by anarchopists 2019. 10. 2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8/13 00:24]에 발행한 글입니다.

하느님을 닮는 삶의 법칙들(에페 4,25-5,2)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법칙들이 있는 듯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되면 철이 든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판별하는 눈이 뜨였다는 말인데, 다른 말로는 처세를 잘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말로도 이해가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사람들이 어떤 감정과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서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을 잘 안다면 처신하기가 그만큼 수월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적 처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하느님의 성품 닮기라는 대명제가 깔려 있습니다. 가능한 한 하느님을 닮은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먼저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라고 권고합니다.

신앙인의 윤리적, 도덕적 법칙 제1명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는 것부터가 덜컥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라고 자문한다면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라는 말도 쉽지는 않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이웃에게”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만, 영어성경 The New English Bible에는 “서로에게”(each other)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 혹은 생활세계에서 내가 타자에게만이 아니라 타자도 나에게 진실(truth)을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우리의 시선을 바꿀만한 시인 횔덜린의 시를 인용해보겠습니다. “성스러운 순결, 그대 인간들과 신들에게 가장 귀엽고 친밀한 것이여! 그대 집 안에서 혹은 밖에서 나이 든 이들의 발치에 앉아 있어도 좋다. 언제나 만족하는 지혜에 찬 이들의 곁에”(<알프스 아래서 노래함>). 횔덜린은 모두가 어린아이들인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사심 없이 살 수 있는 존재자여야 한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의 유한성과 신의 무한성을 같이 갖추고 있는 인간은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그 둘의 조화를 깨뜨리고 인간의 유한성으로 기울어져 삽니다. 신의 무한성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마음에는 신조차 의식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교회당을 들락날락거리는 것인지 습관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내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거짓없이 진실만을 말하려고 하고, 화를 냄으로써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려고 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그야말로 신의 무한성을 드러내는 집단이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신의 무한성을 갈구하는 사람들 내면에는 계산이 없습니다. 비난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정신적 고상함, 영혼의 순수함과 신앙적 고고함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쓸 것입니다. 그것이 타자에게 진리를 드러내는 몸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말하지 않는 사람,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악마(devil)에게 틈(loophole)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의 무한성이 자리 잡고 있다면 악마에게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는 반드시 악마의 틈이 없어야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선을 좇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횔덜린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많은 선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짐승처럼 때로 하늘을 향해 놀라워한다. 그러나 그대에겐 모든 것, 순수함은 얼마나 순수한가!” 횔덜린은 단순히 선함이라고 말하지 않고 '많은 선함'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을 닮기 위한 신앙의 법칙들은 그야말로 많은 선함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화내지 말고 분노하지 말고 상처를 주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고 반문하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순수함의 순수함을 갖고 있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왜 우리는 순수함의 순수함, 아니 순수함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전략적인 인간관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진실한 마음뿐입니다. 편견 없는 순수함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에게 부여한 하나님 닮기의 신앙 법칙 중 제1요건이 되어야 합니다.

횔덜린의 시로 좀더 들어가겠습니다. “보라! 들판의 거친 짐승, 기꺼이 그대를 받들어 섬기며 미더워한다. 침묵하는 숲은 제단 앞에서인 양, 자신의 신탁을 그대에게 말하며 산들은 일러 성스러운 법칙을 그대에게 깨우친다. 또한 아직도 위대한 아버지 많은 체험 가진 우리에게 고지되기를 원하니, 그대 오로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도 되리라.” 횔덜린이 알프스를 쳐다보면서 그 풍경을 묘사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매우 깊은 직관을 보여줍니다. 그가 찬미하는 자연조차도 인간에게 하나님의 성스러운 법칙을 알려주고 있으며, 그들 안에서도 신의 순수함 그 자체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물며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동물이나 식물, 물이나 공기보다 더 나은 듯이 자부하면서 왜 인간 안에서는 신적 직관을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왜 신의 몸짓, 신의 품성을 발견하기가 난감한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진화론을 주창했다고 해서 그리스도교로부터 뭇매를 맞는 찰스 다윈(C. Darwin)이 삶의 세계란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으로만 일관하는 듯이 말한 것처럼 호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지엽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자연은 서로 돕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돕습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은자신만이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려는 욕망과 욕심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한 성품을 인간 안에서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로가 교회란 서로 돕고 서로 이로운 말로서 같이 사는 삶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은 결국 신적 직관, 신의 형상이란 서로 돕고 서로 세우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에 대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평등성과 수평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동일하게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언어, 행동, 표정, 감정, 이성 등이 성스러운 하나님의 법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포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솔직하고 담백하며 진실되고 순수해야 합니다.

횔덜린의 시를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하여 천상적인 힘과만 함께하고 빛이 스쳐 지나갈 때, 또한 강물과 바람 그리고 시간이 서둘러 자리를 찾아갈 때, 그들 앞에서 여일한 눈길과 함께 할 일. 그밖에 더 축복됨을 내 알지 못하며 원치도 않노라. 수양버들처럼, 홍수가 나를 또한 떠메어가지 않는 한, 하여 아늑히 들어올려져 잠자는 듯 물결에 몸 실어 거기로 흘러가야만 하리라. 그러나 충실한 가슴속에 신성을 지니는 자, 기꺼이 제 집에 머무는 법, 하여 내 자유롭게, 허락되는 한 그대 모두, 천국의 말씀들이여! 그 모두를 뜻 새기고 노래하리라.” 그리스도인의 몸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해방의 뜻, 구원의 뜻, 화해의 뜻, 용서의 뜻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몸에 새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닮은 삶의 법칙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자연만물이 자신의 생명을 순응적으로 살아가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 천상의 뜻에 순응하여 가능한 한 좋은 말, 가능한 한 축복의 말을 서로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 안에서(in love)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해야 합니다(try to be like him). 하나님처럼 존재(to be)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보면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존재한다거나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 닮은꼴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라고 하였습니다. 없음이 아니라 있음이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횔덜린이 말한 시의 내용들은 하나 같이 자연을 통해서 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연 안에서 직관적으로 신을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 안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성스러운 삶의 법칙으로 산다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많은 선함을 우리도 품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드러내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없음, 하나님이 안 계신 듯이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것도 안 그런 것처럼 말을 합니다. 또는 안 그런 것을 그런 것처럼 말을 합니다. 물론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서,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하는 윤리적인 딜레마 속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서, 순간적인 처세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속물적인 동물의 본능적 법칙에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횔덜린은 자연에게서 배우라고 말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순수함의 순수함입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특히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는다면, 그 있음을 드러내는 성스러운 삶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회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이 되게 하고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고통과 죽음의 대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신앙적 태도를 저버리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삶의 법칙, 성스러운 법칙은 세상의 처세술과는 사뭇 다릅니다. 수단이 아니라 목적의 목적이요 순수함의 순수함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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