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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근원적인 문자를 찾기 위한 해석학

by anarchopists 2019. 11.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10/23 03:17]에 발행한 글입니다.


근원적인 문자를 찾기 위한 해석학



근원적인 문자(Urschrift)는 주체의 행위 이전에 주어진 시원적 사유의 가능적 표현이다.
자크 데리다(J. Derrida)가 “모든 표현 수단들은 기본적으로 문자”라고 말한 것은 신에 대한 표현조차도 인간의 언어 전달 수단인 문자에 있음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문자로 이루어진 성서의 속뜻을 읽어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경을 읽을 때는 글자에 붙잡히지 말고 그 산 속 뜻을 읽어내도록 끊임없는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7쪽). 문자는 기호로서 일정한 대상이나 의미를 지시하고 있다. 문자는 의미의 표현수단이고 대상 자체를 표상하여 바라보게 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데리다의 한 문장을 통하여 다시 상기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는 문자 자체를 숭배하거나 신성시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자로서의 기호조차도 신의 언표라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의 자기 계시성이 문자에 갇히게 되면, 그것이 뜻하는 바 다양한 해석은 불가능하고, 결국 해석의 단일성(해석학적 전체주의)이라는 폭력에 의해 신의 해체와 신의 왜곡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기호와 기호, 문자와 문자 사이의 틈을 열어 밝혀서 신의 자기 본래성과 참 뜻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불교의 경우 그것을 탈피하기 위해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면서 그것의 속-뜻으로 바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도 경전이 문자에 얽매이는 손실을 줄이고자 해석의 가능성을 놓고 논쟁해왔다. 이와는 달리 유독 그리스도교만큼은 문자, 즉 자구에 매달려 그것이 지닌 본래적 함의를 호도하고, 심지어 그 문자와 음성적 발화까지도 특권층만이 향유하도록 함으로써, 그 해석학적 논의는 닫히고 말았다. 이와 같은 전통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서 일정한 계층 혹은 계급집단의 발화와 해석의 독점권은 많은 신자들의 신앙과 사고, 행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독점계층조차도 문자와 기호에 매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주체는 문자 너머에 있는 속뜻을 파악하고 신의 자기 계시의 넉넉함, 자유로운 체험, 신의 관대함을 말하기보다 문자나 기호를 반복함으로써 신에 자유로운 유희(Spiel)와 상상력(Einbildungskraft)을 방해·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종교의 기호와 문자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광고 문자, 이미지, 선전 문구 등 현대사회의 문자와 기호 또한 의도된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의 이성과 상상력을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말하고 있듯이, 속-뜻으로 들어가야 한다. 겉-뜻은 문자와 기호의 외양에 불과한 것으로서 주체적 사고의 겉-살핌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그것은 임의적이고 단의적인 문자의 음성적 발화수단이자 지시인 것이다. 겉-뜻, 겉-살핌을 벗어나서 기호와 문자, 음성을 해체할 때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다. 해석(exegesis)은 일면 종래의 겉-뜻을 해체하고 속-뜻으로 들어가는(eisgesis)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운 상상력은 문자를 떠나 초월적 존재를 만나게 된다. 이른바 변하는 것(기호, 문자)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속-뜻, 진리), 변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변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진리란, 지축이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물결은 늘 뛰놀면서 바다는 언제나 평한 것처럼,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물결이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리는 바로 그것 때문에 언제나 변함없는 수평을 가질 수 있듯이, 진리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마음을 불살라 열과 빛을 내잔 하늘 닿는 굴뚝이다”(함석헌, 위의 책, 8쪽).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즉 진리를 만나게 된다. 진리를 나타내려면 표현수단이 있어야 한다. 문자와 기호는 진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데 불완전한 표현수단이다. 표현수단이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문자와 기호가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진리를 지시하고 있는 진리 수단이요, 진리의 한 측면이다. 그래서 진리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것이다. 문자와 기호, 음성(적 발화)은 시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함석헌은 근원적인 문자 혹은 근원적인 목소리를 말한다. “성경은 양식이라기보다 산 씨알이다. 씨알이기 때문에 그 첨 형성이 없어지도록 키워내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9쪽) 성서는 양식이라기보다 산 씨알이다. 씨알로 알아듣고 그것을 맨 처음의 음성과 문자로 인식해야 문자와 기호를 넘어서 속-뜻이 내게 들어와 나를 산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맨 처음의 기호와 문자를 자유로운 유희와 상상력에 따라 신을 그려내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신앙적 금기 사항이기도 했다. 신을 형상화하거나 신과 같이 될 수 없는 터부는 오래 전 신화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금기는 초월적 신비의 욕망과 신과의 일치의 갈망을 가능케 하는 일정한 경계이기도 했다. 상상력으로 들어가는 순간 신은 문자와 기호를 넘어서 새롭게 산출되는(Produktive) 형상이요, 기억·연상되는 형상(reproduktive)으로 동일한 신성한 근원, 신성한 것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문자를 탈마법화(탈주술화)해야 한다. 문자나 기호를 신의 전부라도 착각하면 건강하지 못한 광기에 사로잡힌다. 성서가 산 씨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속-뜻)을 자양분 삼아 인간이 살게 된다면, 맨 처음의 목소리는 결국 진리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성서의 속-뜻이 체화될 때 로고스는 문자나 음성을 그치지 않고 형상이 된다. 맨 처음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내가 속-뜻의 사람이 되는가 안 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시적 문자와 기호의 겉-뜻과 겉-살핌이 마치 독실한 신자의 표상인 것처럼 자위하고 착각하는, 또 그렇게 발언하고 교육하는 벌언 주체인 성직자들이 있다면 신의 부재와 신과의 멀어짐을 조장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문자가 모든 것의 표현수단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문자를 해체구성하지 않으면 호교론에 빠지거나 아전인수가 되거나 문자 합리주의자가 되거나 근본주의적인 죽은 문자주의자, 문자 토대주의자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문자와 기호 이면의 산 속-뜻을 읽으려고, 살아 있는 정신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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