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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논단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1

by anarchopists 2019. 12. 1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8/0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강론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1. 설교(강론)는 해석학이다!

교회나 성당에서 설교자(혹은 강론자)가 성서를 현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풀이를 해준다는 것[해석]은 지난한 일이다. 게다가 성서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신이 인간에게 한 말, 즉 계시라는 점에서 설교자로 하여금 더 곤혹스럽게 만든다. 행간과 행간, 자간과 자간 사이를 읽어내는 것은 하나의 능숙한 기교(techne)와 기술(art)이 필요하다. 2천년을 훌쩍 넘긴 고대 문서에는 신이 인간에게 말하고자 한 자신의 이야기가 스며있기 때문에 문자로만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설교자나 주석가는 당혹스럽다. 하지만 성서는 알다시피 신의 마음이 아니라 히브리인과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의 산물이기도 하기에 인간의 말과 마음이 동시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둘의 맥락을 분별하여 다시 회중의 현실에 부합한 말씀으로 풀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해석학이다. 따라서 성서라는 텍스트가 품고 있는 문법, 개념, 구조 등을 풀어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거룩한 신의 말씀으로 와 닿을 수 있도록 자신의 지각된 신의 시선으로 문자를 부상시켜야 한다. 활자화 혹은 문자화되어 있는 성서는 우선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통해서 읽어야 한다. 여기서 읽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나의 실존과 공동체적 상황만을 염두에 두면서 읽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이 말하듯이, 신이 인간에게 들려주듯이 읽는 것이다. 게다가 설교를 위해서 성서를 대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문자를 통해 신과 인간이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청의 자세는 설교자가 텍스트를 대하는 1차적인 태도이자, 해석학의 기본이다.

또한 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청자(聽者,듣는 자-운영자 새김)는 사심 혹은 사적 관심(inter-esse)을 배제해야 한다. 경청은 그저 들음이지 판단이 아니다. 들음은 타자로부터 오는 말과 행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지, 옳다 혹은 그르다, 그렇다 혹은 아니다, 할 수 있다 혹은 할 수 없다 등을 비판(판별, krinein)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과 지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들음으로서의 말씀을 판단하는 선천적 범주나 형식이 될 수 없다. 오직 초월자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와 심상에 열려 있어야 할 뿐이다. 따라서 해석은 초월자를 향한 열려 있음이다.

자칫 설교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공동체와 사적 관심에 의해 텍스트를 자신의 의도로 해석, 분석하여 오독할 수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설교자는 자신에게 아 프리오리한 기준, 범주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실수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초월자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의 무정형적 신의 문법을 간파할 수 없게 한다. 그것을 파악하여(begreifen) 신자 혹은 회중에게 전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해석학적 도구가 절대적이다. 그것은 텍스트를 접근하는 선판단적인 인식의 도구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원어에 대한 지식, 개념, 문법, 문화, 풍습 등의 다양한 '이해'를 말한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에 의하면, '이해'(Verstehen)란 인간이 텍스트를 살피는 데 보다 근원적으로 소급해가고, 근접해가는 '지평융합'으로 설명한다. 리차드 팔머(Richard E. Palmer)는 "해석자가 원문에 대한 해석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는 텍스트의 이해 지평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주제와 상황을 선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볼노브(O. F. Bollow)가 "파악하는 형태는 언제나 새로운 경험의 영향하에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되고 성장된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한 것이다. 선이해의 지평을 가지고 텍스트를 접근하는 것은 삶의 실존들을 통해 이해된 성서의 의미가 증폭되며 그 확장된 의미가 보다 더 근원적인 신앙 경험을 낳고 또한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일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학 혹은 해석을 한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초역사적 계시와 영감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첩된 수많은 역사의 계기들이 서로 만나고 부딪히며 그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가 있다. (2011. 7.31,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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