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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서평, 독후감

성서로운 삶을 향한 존재의 이해: 니체와 에크하르트로 읽는 성서

by anarchopists 2020. 10. 8.

 

책소개

니체와 에크하르트 두 철학자의 시선으로 성서를 바라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자 모험이요 저항의 몸-짓(poiesis)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두 사람을 해석학의 도구로 삼아 성서를 봄으로써 새로운 신앙의 쇄신을 갈망하는 필자의 포이에시스(창작적 언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작금의 종교는 그 본래의 올바른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매너리즘과 아비투스에 빠져 값싼 신앙언어만 생산함으로써 종교의 언어, 경전의 언어가 높은 이상적 가치,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현실에서 새로운 저항의 언어와 사유를 가능케 하고자 한 저자의 성서해석학의 포이에시스적 시론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할 것이다.

목차

 

말을 열면서
종교적 현실언어의 종언과 종교경전의 해체적 해석
1장 종교의 순수한 시원을 향한 첫 걸음
1. 이방인을 위해 이방인이 된 존재, 사도 바울의 행복(엡 3,1-12) 23
2. 세례, 정신없는(영혼 없는) 삶이 깨어남(사 8,14~17) 28
3. 은총의 선물, 결코 맨망하지 않은(고전 12,1~11) 33
4. 카오스적인 신앙의 실재(고전 12,12~31a) 39
5. 사랑, 벗 지향적인 헌신(고전 13,1~13) 45
6. 복음, 그리스도의 나타남(고전 15,1~11) 50
7. 부활, 예수의 호흡을 나누는 것(고전 15,12~20) 56
8. 그리스도 부재(不在)의 불안(고전 15,35~38·42~50) 61
9. 무덤에서 피어오르는 파열의 향기(고전 15,51~58) 66
10. 단순한 일상 그러나 가볍지 않은 구원(롬 10,8~13) 71
2장 종교적 삶의 자리
1. 신앙의 모범은 신성한 외곬일까?(빌 3,17~4,1) 79
2. 신앙의 금기를 넘은 무지(고전 10,1~13) 84
3. 구원은 억측일까?(고후 5,16~21) 89
4. 신앙의 유전자와 아스케제(빌 3,4b~14) 94
5. 최악의 증인(빌 2,5~11) 100
6. 큰 이성의 부활(고전 15,19~26) 106
7. 죽음은 깨어남이다!(계 1,4~8) 112
8. 예수와 사는 방법(계 5,11~14) 117
9. 죽음 이후의 나는 사랑이어야(계 7,9~17) 122
10. 신앙, 이전과는 다른 해방의 족적(계 21,1~6) 127
3장 종교적 언어와 삶의 지근(至近) 존재
1. 거룩한 공간[聖殿]의 여백(계 21,10·22~22,5) 137
2. 목소리와 호명되기 위한 몸짓(계 22,12~14·16~17·20~21) 142
3. 성령으로 놀이되는 삶(롬 8,14~17 행 2,1~21) 147
4. 시인들만이 꿈꿀 수 있는 신앙언어들(롬 5,1~5) 152
5. 믿음의 향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차별은 없습니다!(갈 3,23~29) 158
6. 거저 얻어진 자유는 없습니다!(갈 5,1·13~25) 163
7.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갈 6,1~16) 168
8. 복음, 아름다움 언어(골 1,1~14) 174
9. 신앙의 아르케(arche)(골 1,15~28) 178
4장 종교인의 언어적 구체성, 사랑과 환대
1. 신앙의 껍데기는 가라(골 2,6~19) 187
2. 그리스도인이라는 인간과 삶, 특수한가?(골 3,1~11) 192
3. 신앙의 고향이 없는 사람들(히 11,1~3·8~16) 197
4. 보통의 믿음만 있어도(히 11,29~12,2) 202
5. 신앙의 마음 공간(히 12,18~29) 208
6. 사랑의 지극한 표현, 환대(히 13,1~8·15~16) 213
7. 오직 하나님만을 소유하기를(몬 1,1~21) 218
8. 하나님의 자비는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딤전 1,12~17) 223
9. 기도는 하나님과 상의하는 것입니다!(딤전 2,1~7) 228
10. 많은 사랑을 소유하십시오!(계 12,7~12) 233
5장 신과 삶의 일치, 그 실존의 지금 여기
1. 고뇌와 고독의 속의 하나님(딤후 1,1~14) 241
2. 하나님의 지금 여기(딤후 2,8~15) 246
3. 텅 빔의 부재(不在), 그 역설의 진리(딤후 3,14~4,5) 252
4. 세상은 말씀이 스며들어 잠들고(딤후 4,6~18) 258
5. 모든 삶의 받침대가 되시는 분(살후 1,1~12) 263
6. 종말론적 언어의 카코포니(살후 2,1~5 13~17) 268
7. 성실하기에는 너무 거룩한 세상의 일탈(살후 3,6~13) 273
8. 익숙한 신앙과 결별하는 법(골 1,11~20) 279
9.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것(롬 13,11~14) 284
10. 자신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롬 15,4~13) 288
11. 얄궂은 시간의 유혹(약 5,7~10) 294
12. 예수에게 어떤 색깔을 입히고 싶은가!(롬 1,1~7) 299
13. 아나키스트, 예수(히 2:10~18) 304

보도문:성서로운 삶을 향한 존재의 이해: 니체와 에크하르트로 읽는 성서(종문화사, 2020)

성서(聖書)로움, ()스러움을 넘어 성()스로움과 상서(祥瑞)로움을 지향하며

김대식(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안병욱아카데미 원장,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어쩌다 책의 제목이 성서(聖書)롭다가 되었을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담긴 긴 생의 역사가 기록된 것이 성서라면, 그 성서를 풀이한 필자로서도 성서의 언어와 실천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성서에세이를 세상에 내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인류의 다양한 생각과 사상, 그리고 삶의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얽힌 책이다. 다만, 그 이야기는 신의 말씀이라는 해석학적 차별성이 존재할 뿐이다.

성서에는 상스러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생로병사, 갈등과 전쟁, 질투와 권모술수, 권력에의 의지, 생존의 본능과 자기 자신의 복제를 위한 본능적 생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는 성서라기보다 지금도 왕왕 일어나는 그저 일상적인 상스러움이 여기저기 묻어난다. 그런데 거기서만 그친다면 성서는 그저 다른 이야기처럼 신변잡기의 책으로 손 한 번 거치지도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서가 그것을 넘어서는 이야기로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약간은 천하다고 할 정도로 취급되는 일련의 상스러운 사건들 속에서 신을 만난 그들의 남다른 이야기가 삶의 틈새에서 빛이 되어 드러나기 때문은 아닐까? 신은 그 상스러운 삶도 간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비로움이 있으며, 난감한 일상과 생애의 질곡 속에서도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미세한 음성으로 응답하고 있는 것을 바로 신을 만난 사람들은 느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상스럽다고 하는 일상과 성스럽다는 신의 현현이 중첩되는 사건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성스러운 언어로만 일관되어 성서가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스럽다. 신의 이야기는 일상의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만들며, 그 빛을 따라 살아가면 새로운 삶의 세계가 열린다는 수천 년의 경험담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으니, 성서는 성스러운 이야기면서 동시에 상서로운 이야기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상서롭다는 말은 복되고 좋은 일이 있을 기미가 있다는 뜻이다. 숱한 일상적 경험담과 신의 개입, 그리고 그 초월적 존재에 대한 현전(現前)은 길조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에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늠하게 해 주는 잣대 역할을 한다. 생의 상스러움에 뒤섞여 무너지고 말 수도 있으나, 그럴 때마다 신을 찾고 만나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경사가 생긴다. 좋은 지위를 갖게 된다. 다만, 성서에 나와 있는 신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지키고 살아내는 사람에게만 그리 되는 것은 아닐까? 성서를 읽어보면 그리 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상서롭다는 말뜻에 재앙이 내포되어 있으니 상서로움에서 상스러움으로 추락하는 것은 순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보다도 성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식으로 해석하고 지나치게 자구대로 움직이면 문제가 더 커진다.

이 책은 필자를 비롯하여 사람들의 생이 성서(聖書)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지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여진 글이다. 감히 그리 살지도 못하면서 말만 풀어낸 것은 아닌지 저어가 된다. 하지만 그것도 비워내고 신을 소유하겠다는 욕망도 내려놓으면 삶의 그 무엇에 대한 욕망도 버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니체가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선언했다는 말에 넘어질 필요도 없다. 그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앞부분만이라도 읽고 그를 평가했으면 한다. 그리스도인을 그보다 더 강하게 몰아세우는 철학자요 신학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다. ‘신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신조차도 버려라는 그의 논조는 도대체 무슨 말일까, 생각해 본 적이나 있는가. 현대 종교인들은 자신이 신을 죽이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니체를 나무라고, 자신의 의지대로 신을 부리고 싶어서 신을 소유하려고 안달을 하는 욕망을 가지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 체 한다.

필자는 두 사람의 진정성이 있는 언어를 가지고 성서를 해석하려고 하였다. 나의 시각보다 그들의 시각이 문자를 읽어내는 깊이와 신앙적 의미를 재생산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생각과 해석학적 성찰을 통한 필자의 또 하나의 종교철학, 혹은 신앙적 사유에 함께 해 줄 독자를 기다리고 싶다. 필자의 언어가 상스럽지 않고 상스럽게 다가온다면 그러한 도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러한 상스러운 세계를 넘어서 성스럽고 상서로운 성서의 세계를 꿈꾸려고 했던 필자의 염원만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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