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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논단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3

by anarchopists 2019. 12. 1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8/0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4. 설득과 소통을 위한 설교자(강론자)의 에토스

지금까지 우리는 수사학의 역사나 형식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수사학은 언어를 통한 논증과 진실성의 전달, 설득 등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들어 그리스도교 신학의 성서해석학이나 설교 형식에서 수사학이라는 학문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신학에서 성서해석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나, 수사학이라는 어떤 일부분의 요소만 차용하여 해석학이나 설교에 접합하겠다는 것은 매우 피상적 발상이다. 그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완전히 소화가 되고 훈련이 되어서 그 본래적인 목적에 부합하도록 하는 것이 선결과제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설교가 회중들을 향해서 이루어지는 진리에 대한 설득이라면 수사학이 단지 음성적 발화나 기교, 선동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의 배열로만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설교는 신이 말씀으로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어 행위이다. 절대타자인 신이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지만, 설교란 신이 언어와 음성으로 자신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따라서 설교는 신이 존재한다는 논증이다. 또한 절대타자로서의 신이 숨어 있지만 말-하기를 통해서 인간의 사고와 존재 그 자체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럼으로써 설교의 언어는 절대타자를 향해서 나아가도록 방향을 지어주고 회중들로 하여금 그 언어 안에서 절대타자를 인식하도록 해준다. 따라서 설교자는 먼저 자신의 말-하기가 절대타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회중들이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절대타자에게 개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설교자 역시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존재를 절대타자에게 의탁해야만 비로소 선포가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연설은 아고라(agora)에서 이루어졌다. 누구든 아고라에서 행해지는 연설의 웅변적 경쟁은 평등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평등한 상태로 참여를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수사학은 본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람들을 우롱하고 조정, 조작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것을 염려하였다. ‘연설을 하되 궤변가가 되지 말아라, 진실이 거짓에 가리지 않도록 하라, 연설은 진실을 말해야 할 책임이 있다. 수사학은 말재간이 아니라 청중의 설득을 위한 수단이다.’ 누구든 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 말이나 안 된다. 반드시 설교자가 구사하는 언어는 자신의 언어를 통해 인간의 의식을 재창조하고, 현실을 재창조하며 사회변혁을 위한 언어이어야 한다. "언어를 사회변혁의 도구로 활용할 것, 자기가 찾는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언어를 사용할 것, 자신이 바라는 현실을 불러내는 언어를 사용할 것", 이것이 오늘날 설교자와 연설자에게 요청되는 수사학이다. 그러므로 이제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

설교자의 아고라에서 교회변혁을 위한 언어를 만들어 내야 한다. 사회변혁을 위한 언어, 그리고 바로 그러한 세계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언어를 만들어야만 그 세계 존재가 펼쳐질 수가 있는 것이다. 설교자의 언어와 수사학적 기교는 진리를 말하고, 종교의 초월적 삶을 가능케 하는 창조적 언어이다. 그러므로 괜한 궤변으로 인간을 현혹하고 진리를 왜곡하며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망각하게 만드는 설교자의 수사학적 태도는 삼가야 할 것이다. 수사학이 만일 이성(logos)과 감성(pathos), 그리고 도덕성(ethos)이 조화를 이룬 화자와 청자의 교감과 의사소통 기술이라면, 로고스가 아닌 파토스만을 부추겨서도 안 될 것이다. 더불어 로고스와 파토스는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이성적, 심리적 판단작용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도덕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느냐, 그것이 설득력이 있느냐 하는 것은 화자, 즉 설교자의 에토스가 어떠하냐 하는 것과 매우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설교자의 에토스가 담보되지 않고 그 역할 모델이 되지 못하면서 음성적 발화만을 가지고 청자를 설득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의 말-하기는 오스틴(J. L. Austin)의 언어철학적 측면에서 볼 때, 발화행위(locutionary act)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와 발화효과행위(perlocutionary act)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즉 말하는 그 말 속에는 화자나 청자가 함께 행위하도록 하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발화행위는 단순히 음성적 언어를 말하는 것이고, 발화수반행위는 화자의 언어 속에 진술, 명령, 약속 등의 의미와 행위가 수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발화효과행위는 화자가 청자에게 말함으로써 일정한 행위를 유발시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발화수반행위와 발화효과행위인데, 화자도 발화를 하는 순간 발화에 해당하는 행위를 수반해야 하기 때문이다(발화수반행위). 화자가 회중에게 어떠한 진리를 수호하고 계명을 지키기를 바라면서 명령처럼 선언할 때, 발화자가 그것을 무시하고 그에 수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그 발화는 이미 설득력을 상실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서 발화효과행위는 청자에게 발화하는 순간 그 발화에 걸맞는 행위를 요구하고 바라는 것이다. 문제는 발화자가 먼저 그 행위로서 본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발화에 상응하는 결과적 행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수사학은 발화와 발화수반, 발화효과가 적절하게 나타날 때 비로소 제값을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사학적 도식대로 표현한다면, 웅변이나 언변력을 통해서 청중의 분노, 슬픔, 기쁨, 사랑 등의 감정을 수반하게 함으로써 그 결과로 주어지는 도덕적 변화로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발화자의 인격적 에토스가 먼저 선행되지 않으면 모든 과정들이 잘 이루어진 수사학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청중을 설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설교자들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수사학적 부조화에 있다.
이성적 언어는 고사하고 값싼 언어와 개념만을 나열하면서 회중을 무리하게 감정적으로만 선동하려는 것은 예사이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설교자 자신의 발화와 일치되지 않는 비인격적인 삶은 에토스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 수사학적 근본 능력 자체를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해석학과 말-하기는 에토스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해석이 자신의 지평을 통해서 성서적 지평과 만나고 초월적 지평을 여는 것이라면, 자신의 인격적 투신 없이 불가능할 것이며, 말-하기도 이미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우리의 공통적 삶의 세계에 노출되어 있는 인격적 언표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필자는 설교란 해석학과 말-하기라는 두 가지 구조에 대해서 논했다. 그러나 설교의 궁극적인 방향은 청중의 설득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아무리 해석학적 기교와 말-하기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청중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연설 혹은 설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설득되지 않는 설교는 강제나 강압적 감정을 싹트게 할 뿐, 발화효과적 삶으로 나아가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감동을 받는다, 혹은 은혜를 받았다는 고백이 한마디로 하면 설득당했다는 것으로 말할 수도 있으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의 삶이 하나의 성서적 사건으로 일어나야 진정한 설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청중으로부터 도리어 강제적 설득(?)을 당하지 않으려면 설교자는 설득술을 올바로 배워야 한다. 아니 설득을 위한 수사학의 진의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그 수사학의 근원적 의미에 토대를 두고 설교 행위를 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수사학은 설득의 기술이지 궤변을 늘어놓는 궤변술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대 종교연설은 궤변을 일삼는 개인이나 집단과 맞서기 위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현대 수사학을 구사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궤변을 설교의 수사학적 수준으로 올려놓고자 하는 데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다. 회중은 그 궤변을 통해 자신을 치장하는 설교자들로부터 들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얼른 알아차려야 한다. 과거의 얄팍한 수사학적 기교를 가지고 회중을 현실의 삶으로부터 초월로 이끌겠다는 오만과 착각을 버려야 한다. 그 발화적 진리는 과거에 통용되던 것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수사학 즉 본래 수사학적 진의와 목적대로 활용하고 훈련과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진리를 매매하는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소피스트는 그들의 궤변(詭辯)과 궤설(詭說)이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엄격했다. 진리는 교묘하게 조작하여 사고팔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파술이라는 독특한 대화법을 통해서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훌륭한 철학자의 비판은 오늘날 교회라는 아고라 설교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본다. 진리를 궤설로 바꾸는 설교자는 궤사(詭辭) 혹은 궤사(詭詐)로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또한 설교자의 수사학에 있어서 궤사와 에토스는 전혀 짝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교회 특히 개신교가 무너지는 것은 돈, 스캔들 등의 문제로 보는데, 그것은 결국 설교자 자신의 에토스의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설교자의 수사학적 설득력은 바로 그것, “에토스”에서 나온다는 것을 거듭 강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설교로 고민하는 모든 교회의 설교자들은 말-하기에 앞서 자신의 에토스가 살핏하지 않은지 눈살펴야 하리라. (2011. 7.31,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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