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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함석헌이 본 종교의 행복, 종교는 행복한가?

by anarchopists 2019. 11.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1/21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이 본 종교의 행복, 종교는 행복한가?


연말연시가 되면 종교(특히 교회)는 이른바 ‘특별 (저녁)기도회’ 혹은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기도 총력전에 나선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온갖 생각들이 교차가 된다. 기도를 하는데 ‘특별히’하는 기도라는 것이 있는가? ‘특별기도회’가 있으면 ‘일반기도회’가 있어야 하는가? 특별기도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물론 연말연시를 맞이해서 신과의 소통을 보다 가까이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다잡아 보자는 취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거기에도 마치 20세기 초의 스탈린이나 레닌 집권 이후에 나타났던 노동자들의 경쟁을 부추기고 대중을 통제하던 ‘성과급’이나 그것을 이어받은 자본주의의 물량주의와도 같은 현상들을 볼 수가 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회를 참석하면 그 기도회가 다 끝나고 난 후에 그 결과에 따라서 시상을 하는 것이다. 경쟁을 부추기는 것도, 그렇다고 모티프를 제공하는 것도 아닌 도대체 누구를 위한, 누구를 향한 기도회이기에 그런 발상으로 기도회를 진행한단 말인가? 그렇게 하면 정말 신자들이, 아니 그보다 먼저 성직자들이 행복한가? 사실 자신들도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고 신경이 쓰이는 기도회가 될 것이 빤한데 말이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기도회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종교 자체가 행복한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신자들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강구하고, 심지어 회의를 하면서 종교 본질을 위한 행정과 계획을 논하기보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성직자를 나무라고 꾸짖는 방식은 예수가 원했던 삶이나 조직이 아닌 게 분명하다.

함석헌은 이러한 교회를 향해 “교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물으면서 “자기소화 혹은 자기비판, 자기 섭취를 함으로 할 것”(《함석헌저작집》14, 새 시대의 종교, 한길사, 2009, 33쪽)이라고 말했다. 종교가 타자, 즉 신자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 먼저 자신의 종교를 통해서 참된 행복을 맛보아야 한다. 물론 지도자가 되기 전에 그 행복을 경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고 그것을 일러주기 위해서 성직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신자를 자신의 명예, 권력, 돈, 지위 등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종교가 추구하는 참되고 본질적인 행복은 저만치 멀어져가고 자신의 밥그릇을 위해서 어떤 프로그램과 이벤트로 일관하는 허무하고 공허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다. 그런 불행한 목회자가 신자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함석헌이 말한 것처럼 종교는 먼저 “자기비판”이 있어야 한다. ‘지금 자신의 공동체의 움직임에 대해서 소화가 가능한가’, ‘자신의 능력으로 지도가 가능한가’, ‘신자들이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통제하고 있는 말씀의 섭취력은 어떤가’, ‘종교 공동체의 언어와 사유의 능력은 건전하고 합리적인가’, ‘나의 언어는 권위적이고 일방적이지 않은가’, ‘성직자인 나는 정말 신이 나에게 주신 행복의 본질대로 느끼고 살면서 신자들을 지도하고 있는가’ 등등을 따져가며 진중하게 자문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종교와 삶에 있어서 행복의 근본이 되는 “의미”(meaning)를 찾을 수 있게 된다. “[...] 자기를 이성적인 존재로 자각하고 절대자께 향하여 도리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이제 나와 절대자와의 관계는 원시 시대 모양으로 힘의 문제, 기능의 문제가 아니다. 또 고대 모양으로 감정의 문제, 기분의 문제도 아니다. 지금은 원리의 문제요 의미의 문제다.”(앞의 책, 39-40쪽)

종교는 공허한 삶과 세계에 대해 의미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며, 인간에게 세계의 의미, 삶의 의미를 풀어 밝혀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니까 종교를 갖는다거나 예배와 기도를 한다거나 하는 모든 일련의 종교적 행위는 그것을 통해서 의미가 있어야 한다내지는 의미를 발생시키겠다는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종교의 세계가 의미의 세계로 다가오지 않을 때 종교는 종교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상실하게 되고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문제는 종교가 인간의 의미(meaning)의 세계가 아니라 수단(means)의 세계가 되어 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종교를 통해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거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일신의 안위나 물질적인 축복, 자녀, 건강, 사업, 고득점의 수능, 좋은 대학의 입학, 취업 등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인간은 마치 니체(F. W. Nietzsche, 1844-1900)가 말하듯이, 위험한 산비탈에 서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나의 의지는 인간에게 매달리고, 나는 쇠사슬로 나 자신을 인간에게 묶어둔다. 나는 초인을 향해 위로 끌려올라 가기 때문이다. 나의 다른 의지가 나를 그쪽으로 끌어올리려 하기 때문이다.”(F. W. Nietzsche, 두행숙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부북스, 2011, 219) 인간이라는 존재는 항상 현실과 초월, 신앙과 비신앙, 이성과 몰이성, 인격과 비인격이라는 갈림길에서 고민한다는 것을 니체가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함석헌은 이들을 향해 이성을 가진 인격자로서 삶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양이란 결국 다른 것 아니요, 이치의 체득이다. 물론 의지와 감정의 도야도 있지만 그것은 다 이성의 지도를 통해서만 되는 것이다. 이성은 현상에서 추상함에 의하여 이치, 즉 원리적인 것, 일반적인 것, 통일적인 것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그것으로써 개개의 사물에 대한 자아의 구체적인 반응을 규율해감으로써 자아의 인격을 보다 영원적으로, 보다 윤리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곧 교양이다. [...] 이성이 인격의 중심이요, 첨단이다. 이 자각된 이성이 인간 안에서 빛이다. 그전에 의지가 분명한 뜻도 모르고 추구하던 것을 이제 이성은 절대자와 환경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그 뜻을 밝혀주게 되었다. 감정이 개개 사물에 따라 단편적으로 호불호, 쾌불쾌를 주장하는 데 그치던 것을 이제는 시간적․공간적으로 전체적․통일적 자아를 다 보고 그 관점에서 통제 억제하여 전체의 조화를 가지도록 힘쓰게 되었다. 이것은 이성의 초월의 능력에서 오는 일이다. 이성은 곧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고 자아를 초월할 수가 있다. 이것이 이성의 이성된 소이요, 인간은 이로써 절대자의 절대성, 즉 무한 영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주의 정신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일이다.”(함석헌, 앞의 책, 38-40쪽)

함석헌이 말했다시피, 종교는 늘 인간이 가진 이성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환경을 초월하라고 가르친다. 초월을 지향하는 종교는 이 세계에 대한 가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에 대해서 몰두하면 불행해지고 초조해지며 낙심과 좌절을 겪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보다 현실을 넘어서 신에게로, 혹은 초월적인 세계를 향해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서나 불경 어느 곳에서도 신을 열심히 믿으면 너희가 원하는 가없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신에게로 와라, 신을 의지하라, 의탁하라, 자아를 초월하라는 것이 먼저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종교는 '넘어-섬'이라는 것이다. transcendence, 즉 초월은 현실을 넘어-섬 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초월을 마치 현실을 무시, 외면하고 오로지 현실감이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보다는 인격적인 인간, 완전한 인간, 온전한 인간으로 넘어-가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인 종교인이라면 동시에 교양인이라고 볼 수 있는 바, 그는 자신의 인격을 영원과 윤리적으로 만들어가는 데에 초점을 맞추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옛글에 보면, “성품이 고요하면 정서가 편안하고, 마음이 움직이면 정신은 피곤하다. 참됨을 지켜야만 뜻이 온통 가득 차고, 외물을 따라가자 뜻이 함께 옮겨간다”(性靜情逸, 心動神疲, 守眞志滿, 逐物意移)는 말이 있다.

우리의 정신이 산란해지고 외적인 사물에 치우치게 되면 내면의 고요함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서 인간의 소중한 행복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겠다. 그래서 종교적 이성은 시공간과 자아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절대자와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 환경이나 조건과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인간이 신의 “형상”(Bildung)을 지닌 “교양”이 있는 존재이고, 인격의 “도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삶을 초탈(超脫)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모든 종교는 바로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지금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교를 통해서 추구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성의 빛 안에서 인격의 추구와 삶의 초월인지, 아니면 단지 몸의 욕망을 위한 가시적이고 가변적인 외물인지. 그것을 위해서 예배를 하고 기도회를 하는 것은 아닌지. 종교의 행복 번지수를 다시 찾아봐야 할 일이다.(2012. 1.21,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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