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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1412

하느님을 닮는 삶의 법칙들(에페 4,25-5,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8/13 00:24]에 발행한 글입니다. 하느님을 닮는 삶의 법칙들(에페 4,25-5,2)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법칙들이 있는 듯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되면 철이 든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판별하는 눈이 뜨였다는 말인데, 다른 말로는 처세를 잘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말로도 이해가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사람들이 어떤 감정과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서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을 잘 안다면 처신하기가 그만큼 수월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적 처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하느님의 성품 닮기라는 대명제가 깔려 있습니다.. 2019. 10. 23.
이호재, 《한국종교사상가-한밝 변찬린》(2017. 6, 문사철)을 읽고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8/15 05:00]에 발행한 글입니다. [書評] 제2의 종교개혁가-변찬린 서평자(書評者)는 그리스도교/개신교 신자가 아닌 데다 종교/종교학에 대하여 무뢰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사상과 그들 공동체가 생각하는 현실인식과 교리체계가 어떤지는 모른다. 서평자는 평생을 역사/역사학만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 함석헌 관련 연구단체에 관여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국종교사상가-ᄒᆞᆫᄇᆞᆰ 변찬린》(2017. 6)의 글쓴이, 성균관 교수 이호재도 만나게 된다. 이 책의 주인공 ‘변찬린’(邊燦麟, 1934~1985)에 대해서는 함석헌과 관련하여 ‘성서·동양학회(聖書東洋學會)’의 발기인 중 한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글쓴이 이호재가 《함석헌평화연구.. 2019. 10. 23.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처세술(에페 5,15-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8/20 01:47 ]에 발행한 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처세술(에페 5,15-20) 종교인들은 감히 자신을 신자라고 말합니다. “나는 개신교 신자입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나는 불교 신자입니다”, “나는 무슬림입니다”, “나는 ... 신자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들은 자신이 어떤 일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표명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님은 종교인들의 일반적인 정체성 발언을 몹시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 살지 못할 바에야 그냥 예수님, 하나님, 알라, 부처님, 공자님 등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 겸손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사도 .. 2019. 10. 22.
경제성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8/27 17:22 ]에 발행한 글입니다. 경제성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수차례의 경제개발계획은 국민들 허리띠에 구멍을 더 뚫고 졸라서 이룩한 성장이었다. 경이적인 성장률로 '한강의 기적'이던 성장의 과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올해 4월 기준으로 국내 10대 재벌들이 보유한 800조 가까운 사내유보금은 어떻게 축적되었으며, 그 돈 왜 재투자 되지 않고 재벌 금고 속에만 있을까? 그동안 공정한 경쟁과 분배가 이루어졌다면 과연 소수 재벌들이 이런 천문학적인 돈을 끌어모을 수 있었을까. 중국과 인도를 제외한 신흥국조차도 고도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OECD국가로서 연 3% 전후의 경제성장은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성장일변.. 2019. 10. 22.
종교의 작동 원리(에페 6,10-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8/28 23:04 ]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작동 원리(에페 6,10-20)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의 위기는 잘 간파하면서, 그에 비해 정작 신앙의 위기는 잘 못 알아차리는 것 같습니다. 아니 좀더 면밀하게 따져보면 둘 다 잘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살인, 폭염, 홍수, 테러, 교통사고, 화재 등 수많은 위기와 위기의 가능성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가 말한 이른바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과 연관된 것들입니다. 위기의 사건과 사고들은 인간 사회 그 자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의 전체로서 조직, 작동되고 있는 인간 사회가 품고 있는 문제들이 나타난.. 2019. 10. 22.
실천하는 종교, 실천도 하늘로부터(야고 1,17-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9/02 22:17 ]에 발행한 글입니다. 실천하는 종교, 실천도 하늘로부터(야고 1,17-27) 신앙적인 삶과 보편적인 삶의 동일성 종교의 깊은 가르침은 삶으로 실천해야 제맛입니다. 지구상의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도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믿는 대로, 배운 대로, 깨달은 대로 실천해야 참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종교는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물론 신앙과 지식, 그리고 신과의 합일이라는 것도 매우 자의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경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야고보는 온갖 좋은 것들, 모든 선물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 아버지로부터(come from above) 온다고 말합.. 2019. 10. 22.
부름의 형이상학적인 삶(야고 2,1-1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9/09 22:56 ]에 발행한 글입니다. 부름의 형이상학적인 삶(야고 2,1-17) 인간의 피투성과 부름의 평등성 하이데거는 인간이 속절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을 '피투성'(Geworfenheit)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이를 소설가 밀란 쿤데라(M. Kundera)는 “삶은 덫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원치 않는 태어남, 육체의 한계에 갇혀서 죽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 이 말이 쉬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애초에 원치 않았던 인간의 태어남조차도 분명히 어떤 부름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름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부름의 힘과 주체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세상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름의 공평함 속에서 누구는 그 부름을 신의 부.. 2019. 10. 22.
그리스도인의 신앙언어 사용법(야고 3,1-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9/17 01:31 ]에 발행한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언어 사용법(야고 3,1-12) 언어대중과 신앙언어, 말의 진중함 모름지기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입니다. 특별히 무리를 지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집단을 언어대중이라고 한다면, 좀더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신앙언어라는 특수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을 그리스도교라고 합니다. 신앙언어는 신앙인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개념과 말과 표현이 있어서, 일반 대중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언어가 마치 보편적인 일상언어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다른 언어대중들에게 아무 거리낌이 없이 말을 하곤 합니다. 문제는 신앙언어를 사용하는 .. 2019. 10. 22.
風謠, 그리고 두 정상의 만남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9/20 15:16 ]에 발행한 글입니다. 風謠, 그리고 두 정상의 만남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功德修叱如良來如) 이는 신라 양지(良志)라는 승려가 노동요를 불교적 공덕의 노래로 바꾸어 재 창작한 〈風謠〉(풍요)라고 하는 향가(鄕歌)다. 현장에서 불리는 노동요는 짧고 간결하면서 반복 구조가 핵심으로, 힘들여 일하는 것에 리듬을 주고 노동의 힘겨움을 잊게 하고 힘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노래였다. 는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표현법으로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에 나서.. 2019.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