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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부름의 형이상학적인 삶(야고 2,1-17)

by anarchopists 2019. 10.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9/09 22:56 ]에 발행한 글입니다.

부름의 형이상학적인 삶(야고 2,1-17)

인간의 피투성과 부름의 평등성
하이데거는 인간이 속절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을 '피투성'(Geworfenheit)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이를 소설가 밀란 쿤데라(M. Kundera)는 “삶은 덫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원치 않는 태어남, 육체의 한계에 갇혀서 죽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 이 말이 쉬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애초에 원치 않았던 인간의 태어남조차도 분명히 어떤 부름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름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부름의 힘과 주체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세상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름의 공평함 속에서 누구는 그 부름을 신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저 산파에 의한 부름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어떤 부름이라고 하더라도 부름은 공평함을 전제로 합니다. 적어도 내가 태어나 세상과 맞대면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의 사회적 환경이나 질서나 법에 의해서 원치 않는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동일한 선상에서 부름의 형이상학은 그 부름의 실체로부터 기원하는 권위(진지한 사유도 없이 아예 처음부터 신이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않더라도)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의 삶터와 부름의 무차별성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에게 위와 아래 수직적인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형제자매입니다. 그뿐입니다. 수직적이고 제도적이고 체제적인 질서라고 하면서 차별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이웃이라도 나의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면(Love your neighbour as yourself), 나는 타자에게 투영되어 또 다른 나로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타자에게 나는 더 이상 낯선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물론 나와 너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나로서, 너는 너로서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특수성이 차별의 전제는 아닙니다. 부름의 형이상학에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초월적인 곳에서 꿰뚫고 들어오는 부름의 목소리는 모두가 동일한 출발점에서 떠나되 우열과 강약이 서열이 되고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일러줍니다.

횔덜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정, 사랑, 교회당과 성자들, 십자가, 영상들, 제단과 설교단과 성가, 설교가 그에게 울린다. 주일학교는 식사 후에 남자어른과 어린이와 처녀, 경건한 여인들을 위한 졸리는 가운데 한가한 대화로 보인다. 그러고 나서 주님은, 시민이면서 예술가인 그는 들녘을 즐겁게 이리저리 거닐고 고향의 초원을, 젊은이가 깊은 생각에 잠겨 역시 거닌다”(<우정, 사랑...>). 말과 개념의 차이일 뿐이지 실상은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느 것 하나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들이 없습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차별하지 않겠다는 의지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정이 되었든 사랑이 되었든 모든 것은 하나의 공간과 하나의 근원에서 싹이 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같은 삶터, 공동의 삶터에 살고 있으면서 왜 어떤 사람은 차별을 받아야 하고, 왜 어떤 동물과 사물은 천대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부름의 형이상학과 이웃사랑
공동의 삶터는 공통적인 부름의 형이상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삶의 순간적 다양성과 파편들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동일한 연속성과 연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횔덜린의 “한가한 대화”야말로 나와 너, 나와 그것 사이의 평등성과 공통성, 그리고 공평성 위에서만이 가능한 행위입니다. 시공간의 평등한 부름, 그리고 목소리의 평등한 부름, 공평성과 공통성이라는 지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한가함은 누군가의 분주함에 의해서 누리는 혜택이고, 대화는 누군가의 귀 기울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정신과 감정의 교환입니다. 그 속에서 한 사람이라도 수직적 관계를 형성하고 우위를 독점하겠다고 하면 차별이 생깁니다. 삶의 시공간의 불평등과 대화하는 목소리의 불균형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차별이라고 말합니다. 차별을 극복하는 방법은 단 하나, 사랑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수평적 관계를 강조한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나란히 더불어 삶을 살면서 내 옆 가까이에 있는(근처의, neigh, cf. near) 존재(bor, 농부)를 사랑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이 선택해서 이 세계의 고통이나 좌절을 맞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름의 형이상학적인 힘에 의해서 이 세계와 맞선 자신이 되어 힘겹게 살아가는데, 거기에 차별 대우까지 받는다면 살 의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빗대어 영어성경(The New English Bible)에서는 snobbery, 즉 신사인 체하기, 속물적 언동이라고 말합니다. 신분, 학식, 지위, 빈부귀천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는 속물적 태도가 그리스도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을 편견 없는 이웃으로 보는가, 공평무사한 시선으로 보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사랑의 시선과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태도일진대 거짓 표준, 잘못된 기준, 자신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행위입니다. 횔덜린은 주님을 수평적 존재로까지 묘사합니다. 시민이면서 예술가가 되는 주님은 평범한 존재인 동시에 평범함을 독특한 숭고함으로 격상시키는 존재로까지 말을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도 하나의 존재가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유연한 판단 잣대가 있어야 합니다. 차별이나 그로인한 모순된 판단을 내리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의 아들이라는 두 신분을 조화시킨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처사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두 신분의 사랑을 충족시키면서 하늘의 사랑과 땅의 사랑이 일치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믿음, 가난한 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
하늘의 사랑과 땅의 사랑이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은 하늘의 사랑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그 사랑이 땅의 사랑으로 표현되도록 하지 못한다면, 일관성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땅의 사랑을 통해서 하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가르쳐준 예수를 생각해볼 때에, 그는 결단코 땅의 사랑은 천박하고 하늘의 사랑은 고상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사랑을 나타내고 그 사랑의 징표가 곧 하늘나라의 현현임을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곧 인간이 수평적 관계에서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곳 속에 나타납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사랑도 속물적이거나 그럴 듯하게 속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거짓 사랑으로 속이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더욱이 믿음과 실천은 종교에서 동전의 양면입니다. 이 둘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믿음을 말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과 실천이 일치가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이중적인 마음과 태도를 취하는 것은 비신앙입니다. 지위, 학식, 부유, 복장, 생김새와 같이 겉만 보고 판단하고 사랑하는 척하며 너스레를 떤다면, 그것은 믿음도 없는 것이고 믿음에 따른 행위도 서로 부조화된 것입니다.

다시 밀란 쿤데라의 말을 언급하겠습니다. “삶은 덫이다.” 삶을 조금만 살아보면 이 말을 금세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가 종교생활을 한다는 그리스도인까지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속물근성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인생은 정말 서글프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외모와 외형에 따라서 사랑을 받고 안 받고 판단되고 결정된다면 부름의 형이상학적 힘에 의해서 세계에 나온 모든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서 살아야 합니다. 타자에 의해서 내가 어떻게 평가받을지, 그 평가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해석하면서 부단히 거기에 맞추며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름의 형이상학적 힘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누구나 불러서 나온 공평한 삶, 평등한 삶, 공정한 삶에 대해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모두가 사랑받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요?

부름의 올바른 응답, 서로 사랑
우리가 죄 짓지 않으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잣대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사랑으로 믿음을 표현할 수 없다면 구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공자(孔子)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하늘에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 곳에도 기도할 수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로 덧붙입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한번쯤 자신의 부름이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그 부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부름의 형이상학적인 가치는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름의 형이상학적인 힘에 이끌려 이 세계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공동의 삶터, 공통의 삶터에서 서로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삶터가 예수와 함께 거니는 구원의 삶터, 자비의 삶터가 되지 않을까요?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간신히 대학 두어 곳에서 철학과 종교를 가르치며 먹고 사는 사람, 칸트와 후설에 입각한 해체구성적 종교를 지향하는 사람, 함석헌과 같은 아나키즘(해석학적 호불호가 엇갈리지만)적 인간의 자유와 에코아나키스트 머레이 북친과 같은 자연의 해방을 염원하는 사람.



***공고****(알립니다!!!)

수신: 회원 여러분

발신: 3 단체장

제목: 가을 학술모임(영주)

선생님, 안녕하세요? 올여름 폭염과 태풍. 장마, 폭우 잘 이겨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9월을 맞아 함석헌학회(학회장 이재봉)는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 황보윤식) 및 민본주의실천연대 (대표: 김영모) 와 공동으로 다음과 같이 경북 영주에서 학술발표(공부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겸하여 이왕지사 영주에 간 김에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영주 부석사도 둘러보고, 소백산국립공원 자락길을 산책, 또는 비로봉 정상까지 오른 뒤 풍기에서 온천욕을 즐겨보는 가을 나들이 일정도 마련했으니 많이 참석해주시기를 앙망합니다.

2018. 09.0

함석헌학회 학회장 이  재봉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 황보윤식

민본주의실천연대 대표 김  영모

1. 학술발표(공부모임)

 . 일시: 2018928() 17:00-19:00

 . 장소: 청년유도회

 . 주제: “정도전의 민본주의와 함석헌의 씨알사상”

 . 발표:(사회: 민실련,

   - 강정구(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공동의장), 의 입장에서 본 평화통일운동”  

   - 황보윤식(민실련), 民人과 민본주의 본질”

   - 김대식(연구소) “정도전의 과 함석헌의 씨ᄋᆞᆯ의 차이와 유사점”

   - 이재봉(학회), “비폭력저항의 이론과 실천”

 . 뒷풀이 있습니다. 뒷풀이 후, 소백산 취래원으로 이동함.

2. 가을 나들이

 . 영주 부석사(해설: 황보윤식 소장)

 . 소백산 자락길(9.29)

 . 풍기온천(할 사람만)

* 28일 숙박은 황보윤식 교수님이 소백산 자락에서 운영하는 취래원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하되, 식대는 개인적으로 부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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