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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그리스도인의 신앙언어 사용법(야고 3,1-12)

by anarchopists 2019. 10.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9/17 01:31 ]에 발행한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언어 사용법(야고 3,1-12)


언어대중과 신앙언어, 말의 진중함
모름지기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입니다. 특별히 무리를 지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집단을 언어대중이라고 한다면, 좀더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신앙언어라는 특수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을 그리스도교라고 합니다. 신앙언어는 신앙인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개념과 말과 표현이 있어서, 일반 대중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언어가 마치 보편적인 일상언어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다른 언어대중들에게 아무 거리낌이 없이 말을 하곤 합니다. 문제는 신앙언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나 일상언어를 사용하는 비종교인이나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말을 가볍게 취급하여 함부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언어대중의 언어 규약을 무시한다거나 배려하지 않고 말을 한다거나, 고성과 고함을 치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제하여 타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인격언어, 배려언어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고 내면의 깊이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야보고는 말에 실수가 없으면 몸을 다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을 했을까요? 몸의 여러 기관을 거쳐서 뿜어져 나오는 목소리 혹은 말은 몸의 감각과 몸의 느낌을 승화시켜서 가장 적절한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 신칸트학파의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E. Cassirer)는 “언어가 없으면 사람들의 공동생활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어야말로 공동생활에 있어 많은 장애요소를 가지고 있다고도 보았습니다. 그만큼 한 집단 안에서 언어라고 하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척도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나라 속담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만큼 말이 차지하는 힘이 매우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은 공동체를 지속가능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를 완전히 와해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앙언어, 섬김언어
신앙인들이 제일 먼저 범하기 쉬운 실수는 자신의 말을 앞세워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들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횔덜린은 “모든 생명들 그대와 근친으로 마음 통하지 않는가, 운명의 여신 또한 스스로 봉헌 가운데 그대를 키우지 않는가? 그렇다, 때문에 아무런 보호 없이 삶을 통과해 거닐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시인의 용기-두 번째 원고>)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생명들이 서로 마음이 통하듯, 생명들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기도 합니다. 생명을 생명이 키우고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인의 언어 속에서 보면 모든 생명들은 서로 경쟁관계가 아니라 상보적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하는 수평적 관계의 매체이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지칭하는 위압적인 도구가 아닙니다. 언어는 살리는 것이고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타자의 생명을 유린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앙언어는 교회 공동체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중요한 신앙매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신앙언어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행동으로 뿐만 아니라 말로서 하나님께 봉헌하고 사람들을 섬기는 언어입니다. 신앙언어는 다른 언어와 달리 사람을 높이고 타자에게 바치는 말입니다. 타자에게 바치는 언어, 타자에게 드리는 언어는 내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공통된 언어라는 고백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성스러운 언어, 타자에게 바치는 사랑스러운 언어는 서로를 세우고 신앙을 키우는 언어가 됩니다. 서로 군림하고 높아지려고 언어를 사용하는 신앙인은 상대방을 폄하하고 비난하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어가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언어 사용의 신중함을 드러냅니다. 나의 신앙언어가 타자를 섬기고 언어로 마음을 바치고 사랑을 드리는 언어가 아니라면, 차라리 침묵함으로써 신앙의 배가 좌초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신앙언어, 평화의 기호
신앙 공동체가 망가지거나 오랜 지속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말 사용, 신앙언어의 부작용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말 한 마디가 자신을 죽이는 것은 물론 주변의 많은 신앙인까지도 말이 갖고 있는 좋지 않은 기운으로 상처를 주기에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그래서 혀는 불과 같고 악의 덩어리라고 단정 짓습니다. 인간의 몸에서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 치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더럽히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분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횔덜린은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일어나는 일, 그 모두 그대를 축복하니 기쁨으로 변하도다! 아니면 그대를 괴롭히는 그 무엇 어디에 있으며, 마음이여! 그대 가야만 할 곳 막아서는 그 무엇 있을 수 있는가? 왜냐면, 노래가 필멸하는 자의 입술을 평화롭게 숨 쉬면서 훔쳐버린 이래로, 고통과 행복 속에서 이롭게 하며 우리의 노래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한 때문에. 그처럼 가까이.”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복으로 이어지는 것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되레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말의 높낮이와 리듬에 의해서 이루어진 음성적 기호가 입에서 소리로 흘러나온다면, 비록 고통의 음성적 떨림은 있을지언정 기쁨과 행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신앙언어, 살리는 말
우리는 간혹 입술 위에 올려진 단어나 소리 그리고 음성적 발화를 통해서 마음이 흘러나오는 것이 평화, 기쁨, 행복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입술의 떨림, 성대의 울림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 이전에 충분히 마음의 작용이 어떤 상태이며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독이 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짐승들이나 동물들을 길들이는 말 따위는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낯선 타자나 신자를 말로서 길들이겠다는 발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입술에 올린 말은 순간적으로 독이 될지 약이 될지 판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찬양이 될지 저주가 될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 가지의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 불경한 말이 아니라 거룩한 말을 하는 입술이 되도록 마음을 다 잡아야 합니다. 입술에 올린 말은 결국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언어를 내뱉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압니다.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는 말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삶의 곁에서 속삭이는 신앙언어
횔덜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민중의 가인들, 우리도 살아 있는 자들 곁에 자리했었도다 거기 많은 것들이 어울리고 기뻐하며 모두에게 사랑스럽고 모두에게 탁 트인 곳, 그처럼 우리의 선조, 태양의 신, 물론 그러하도다...(중략)... 그처럼, 언젠가 때가 되고 그의 권리가 정신을 어느 곳에서도 궁핍케 하지 않으면, 그때 사라져 가리, 그처럼, 삶의 진지함 가운데 우리들의 환희 죽어가리, 그러나 아름다운 죽음을!” 시인들은 민중을 위해서 노래하는 사람들이고 세계의 창작자들입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 태양신 같기도 하고 선조의 정신을 기억나게 하며 전통과 전승을 축조하는 사람들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시인들은 죽은 자들의 가객들이 아니라 산 자들을 위한 가객들입니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 노래하는 것은 들을 수 있고 반응할 수 있는 존재들을 위해서 말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말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 또한 산 자들이 삶을 살도록,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들의 곁에서, 삶의 곁에서 속삭여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언어가 상황에 따라서는 산 자들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무덤 곁에서 말을 하듯이 죽은 언어를 내뱉는 것처럼 들릴 때도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입술에 올린 말이 서로를 살리기보다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말이 산 자들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 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신앙언어의 신중함과 순수함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하나의 말로 두 가지 생각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하나의 소리로 두 가지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이중인격자입니다. 때에 따라서 거기에 맞게 말하고 적절하게 단어를 선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럴 때 말은 사라지고 마음만이 남게 됩니다.' 말이 남아도 마음을 읽어낼 수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말이 아닙니다. 정신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서로 풍요로워지려면, 말을 사용한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 목적 그 자체로' 다가오도록 해야 합니다.
한 입에서 같은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 말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려면 진지한 말과 진실한 마음에 기원을 둬야 합니다. 한 입에서 독설과 아첨, 사랑과 정의가 동시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또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부정하는 힘에 의해서 신앙언어의 순수함이 살고, 말과 목소리의 죽음으로 삶의 진지함과 관계의 솔직함, 그리고 그 언어로 인한 하나님의 현존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중용(中庸)에 “군자의 말은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된다”(言而世爲天下則)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이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말의 실수를 줄이려고 노력만 해도 훌륭한 일입니다. 사람이 말의 실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지도록 혹은 그것을 줄이도록 내 입술에 올린 아름다운 말조차도 거짓이 아닐까를 늘 성찰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전한 인격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간신히 대학 두어 곳에서 철학과 종교를 가르치며 먹고 사는 사람, 칸트와 후설에 입각한 해체구성적 종교를 지향하는 사람, 함석헌과 같은 아나키즘(해석학적 호불호가 엇갈리지만)적 인간의 자유와 에코아나키스트 머레이 북친과 같은 자연의 해방을 염원하는 사람.



***공고****(알립니다!!!)

수신: 회원 여러분

발신: 3 단체장

제목: 가을 학술모임(영주)

선생님, 안녕하세요? 올여름 폭염과 태풍. 장마, 폭우 잘 이겨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9월을 맞아 함석헌학회(학회장 이재봉)는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 황보윤식) 및 민본주의실천연대 (대표: 김영모) 와 공동으로 다음과 같이 경북 영주에서 학술발표(공부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겸하여 이왕지사 영주에 간 김에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영주 부석사도 둘러보고, 소백산국립공원 자락길을 산책, 또는 비로봉 정상까지 오른 뒤 풍기에서 온천욕을 즐겨보는 가을 나들이 일정도 마련했으니 많이 참석해주시기를 앙망합니다.

2018. 09.0

함석헌학회 학회장 이  재봉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 황보윤식

민본주의실천연대 대표 김  영모

1. 학술발표(공부모임)

. 일시: 2018928() 17:00-19:00

. 장소: 청년유도회

. 주제: “정도전의 민본주의와 함석헌의 씨알사상”

. 발표:(사회: 민실련,

   - 강정구(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공동의장), 의 입장에서 본 평화통일운동”  

   - 황보윤식(민실련), 民人과 민본주의 본질”

   - 김대식(연구소) “정도전의 과 함석헌의 씨ᄋᆞᆯ의 차이와 유사점”

   - 이재봉(학회), “비폭력저항의 이론과 실천”

. 뒷풀이 있습니다. 뒷풀이 후, 소백산 취래원으로 이동함.

2. 가을 나들이

. 영주 부석사(해설: 황보윤식 소장)

. 소백산 자락길(9.29)

. 풍기온천(할 사람만)

* 28일 숙박은 황보윤식 교수님이 소백산 자락에서 운영하는 취래원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하되, 식대는 개인적으로 부담합니다.

알림--------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님이신 황보윤식 선생님께서 동인천 싸리재 카페에서 10월 4일부터 매월 첫째 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묵자강독이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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