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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실천하는 종교, 실천도 하늘로부터(야고 1,17-27)

by anarchopists 2019. 10.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9/02 22:17 ]에 발행한 글입니다.

실천하는 종교, 실천도 하늘로부터(야고 1,17-27)


신앙적인 삶과 보편적인 삶의 동일성
종교의 깊은 가르침은 삶으로 실천해야 제맛입니다. 지구상의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도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믿는 대로, 배운 대로, 깨달은 대로 실천해야 참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종교는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물론 신앙과 지식, 그리고 신과의 합일이라는 것도 매우 자의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경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야고보는 온갖 좋은 것들, 모든 선물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 아버지로부터(come from above) 온다고 말합니다. 신앙에서 추구하는 최상의 것들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세계의 것들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비가시적인 세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늘로부터 기원한 것들을 보고 듣고 체험하면서 그것을 삶으로 풀어내는 사람들입니다. 계시된 말씀을 토대로 최상의 삶의 가치들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활세계에서 그 신앙적 삶이 보편적인 삶이 되도록 살아내려는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참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가 표방하는 가치들을 가장 잘 구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 조금 더 나아가서 신적인 것을 구체화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초월적인 가치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고 표출하면서 하나님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적인 것, 신적인 현현을 마음과 행동으로(act on) 말하려는 신앙인이 진리를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truth)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 진리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반진리 혹은 비진리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신적인 현존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실존입니다.


구원의 위험한 역설, 신앙적으로 말하고 듣기
횔덜린은 “가까이 있으면서 붙들기 어려워라, 신은(Nah ist/ Und schwer zu fassen der Gott).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엔 구원도 따라 자란다”(<파트모스, 홈부르크의 방백에게 바침>)고 말합니다. 신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자기 기분과 안정을 위한 존재로서 눈앞에 두기에는 녹록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존재라면 모두에게 신앙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인식은 믿음에 행위를 동반해야 가능합니다. 그런 긴장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거니와 매력도 없을 것입니다. 잡기 어렵고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힘을 써가며 자신의 눈앞에 보이도록 하려는 신앙이 깊이를 더욱 달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적인 것이 눈앞에 나타나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가장 하기 힘든 인식과 감각의 습관인 듣고 말하기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정말 제대로 타자의 말을 잘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말을 올바르고 진정성이 있게 전달한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힘들겠느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분명히 듣는다는 것, 말한다는 것은 두 가지 다 하늘로부터 기원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삶에서 최상의 것을 부여받은 것이요, 인간으로서 가장 완전한 선물이자 은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듣는 것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이른바 경청이 안 됩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듣고 싶은 것, 내가 욕망하는 것만 듣고 싶어 하기에 지금 나의 앞에, 나의 옆에, 나의 뒤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늘에서 내려온 로고스라고 믿지 않으니 사람들의 말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달이 납니다. 충분히 듣고 많이 들으면서 이해하려는 습관은 타자의 말을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경고이든 칭찬이든 조언이든 비난이든 분노이든 “빨리”(be quick), 예민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대신에 말은 천천히 내뱉는 것은 신적인 현존과 신적인 진리를 의식하고 있다는 신앙지표입니다.


듣고 말하기의 신적인 공평한 감성
이는 듣고 말하는 것, 즉 청자와 화자의 관계, 그 사이에 신의 현존, 신적인 느낌이 개입된 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화를 내는 일도 천천히 하게 될 것입니다.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화를 다급하게 내게 되면 실수를 합니다. 관계가 깨지고 공동체가 와해됩니다. 인간사에서 듣고 말하고 그리고 화를 더디게 하는 모든 몸의 감각기관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신앙적 훈련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서의 저자가 신앙과 삶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말을 듣고 말을 하면서 그 관계에서 발생되는 화의 감정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를 괜히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마르틴 하이데거조차도 횔덜린의 시에서 철학적 영감을 얻었을까요? “위험이 있는 곳엔 구원도 따라 자란다”(Wo aber Gefahr ist, waechst/ Das Rettende auch). 그만큼 나의 눈앞에 신을 나타나게 하고 보게 하는 것은 나의 삶의 습관들에 대한 변혁이 아니면 어려운 일입니다. 들음과 말, 그리고 감정의 조절은 신의 현현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칫하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수렁에 빠뜨릴 수 있고 공동체를 완전히 분해시킬 수 있기에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거기에 그만큼의 구원이 동반된다는 사실입니다. 몸의 감각기관들과 인식기관들을 잘 절제하고 감정까지 다스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올바르심, 즉 정의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구원의 실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은 모두 공평한 감성입니다. 게다가 노하는 것조차도 누구에게나 평등한 감정이니, 이를 통한 신적인 것, 하늘로부터 온 것을 절제, 제어하면서 그 사이(inter)를 나누는 것[분배]은 신적인 것의 개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의와 감성의 몫
정의는 진리의 말씀에 따라 탄생시킨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 인식을 통하여 추하고 악한 행위들을 배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올바르게 듣고 그 말씀을 자신의 말이 아닌 위로부터 주어진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타자의 감정을 배려하여 화를 돋우지 않도록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자도 동일하게 나의 말을 듣고 감정을 이해하도록 배려하는 것, 모든 감각과 감성, 그리고 감성의 적절한 몫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감정조차도 일방적일 때 문제가 됩니다. 인간관계든 직장이든 사회든 국가든, 교회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말하기의 균배(均配), 듣기의 균형(均衡), 감정의 균등(均等)은 모두 위로부터 주어진 사람들의 정당한 몫, 즉 정의입니다. 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이 균배(均排)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의 속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믿음이 타자를 인정하고, 다름을 인정하면서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열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횔덜린은 “그러니 우리에게 순결한 물길을 달라, 오 우리에게 날개를 달라, 진실하기 그지없이 거기를 넘어가고 다시 돌아오도록”이라고 요청합니다.


말씀의 공유와 듣기의 무게감
말씀은 교환이고 반성(reflection)입니다. 말씀은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물길이요 날개입니다. 말씀의 길은 위에서 받아서 관계 속에서 말해지는 것을 교환하는 것이니 초월의 말씀은 다시 서로 상대방을 통한 거울 역할을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서로를 비춤으로써 말은 넘나듦니다. 말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진 초월자의 말씀의 공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말이라고 해서 타자에게 무심코 소리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말이 말씀에서 파생된 것임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말하기보다 듣기를 먼저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의 신중함이 그 말씀을 진리로 알고 마음에 품은 진리 그 자체에 근거해서 말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저자가 말하기보다, 듣기를 강조하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못하고의 척도가 곧 말의 제어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약자를 위한 실천 속의 말씀의 현존
참된 종교적 신앙의 판가름은 실천의 유무, 실천의 강약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평소에 간과해왔던 말하기와 듣기, 그리고 감정의 조절이 그 신앙실천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감각과 감성, 그리고 감정의 기원조차도 초월적인 데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의 감각과 감성, 그리고 감정을 다 포괄하는 몸이라는 것을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더 순수한 종교생활을 다지는 신자라면, 우리와 똑같은 감각과 감성, 그리고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돌볼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실천으로 옮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삶에 하나님의 현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 속에서 비종교인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포착하게 됩니다. 타자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나불대고, 타자의 말을 성의 없이 듣는 인간, 그리고 마침내 상대방을 오해하게 됨으로써 노를 발하는 감정조절장애를 가진 종교인,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에게서 과연 위에서 오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감각과 감성, 그리고 감정의 공정한 몫에 대해서, 특히 약자의 감성의 몫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간신히 대학 두어 곳에서 철학과 종교를 가르치며 먹고 사는 사람, 칸트와 후설에 입각한 해체구성적 종교를 지향하는 사람, 함석헌과 같은 아나키즘(해석학적 호불호가 엇갈리지만)적 인간의 자유와 에코아나키스트 머레이 북친과 같은 자연의 해방을 염원하는 사람.


#공고

함석헌평화연구소는 10월부터 격주 목요일(가능하시다면 매주 목요일)에 동인천역 근처 싸리재라고 하는 카페에서 연구소장이신 황보윤식 선생님의 묵자강의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시간은 오후 7시가 될 것입니다. 그 외 다른 강좌도 계획, 논의 중에 있습니다. 독자제현의 많은 참여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들은 간단한 댓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9월 28일에는 경북 영주 취래원(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님댁)에서 <정도전의 민본사상과 함석헌의 씨알사상에 대한 비교 연구>(가칭)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발표자는 이재봉 교수님(함석헌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교수), 황보윤식 소장님(함석헌평화연구소장), 김대식(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이 되겠습니다. 애초에 동양대학교와 공동주최를 하기로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의 성사 단계에서 의견 조율이 잘 안 된 것 같습니다. 역시 많은 참여와 관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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