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7/30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믿음의 서술, 신앙의 서술은 자기 욕구에 의한 노력 없이는 애초에 신앙의 수사학적 진술은 불가능하고 신앙 근처에까지 가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내가 힘써 믿기를 결정하면, 그러면 믿어지는 자리에 갈 수 있”(함석헌, 위의 책, 378쪽)다는 함석헌의 말이 반증합니다. 신앙의 현상학에 가려져 있는 것은 맹목성이나 무모성 혹은 도전성과 투신성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입니다. 계시의 주체성과 계시 현상을 논하기에 앞서 신앙의 자리는 인간이 점유해야 하는 자발적 성찰의 자리이기 때문에 신앙의 부재는 처음부터 노력과 의지라는 심리적 서사를 빼놓고는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한 텍스트, 가시적인 텍스트로서의 존재가 없기 때문에 신앙적 상상력이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내가 각별한 정성을 쏟지 않더라도 아버지 말을 듣고 아버지를 대할 수 있지만 아버지가 멀리 떠나시고 안 계실 때, 내가 정성을 기울여 내 편에서 아버지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어떤 감동에 이르기는 힘들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79쪽)
절대타자 혹은 초월자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서 죄와 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석헌은 초월자에 대한 상상력의 수행이 신앙 감정의 사건이 발생된다고 믿습니다. 상상력은 개별자들에게 모두 주어져 있는 자율성이지 특정 계층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유로운 사건과 행위를 막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력과 그에 대한 해석, 그리고 신앙 지침은 특권 계층에게 있는 것처럼 통제하고 선언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의(THEIR) 해석학을 통해 상상력을 독해하기 전까지는 개별자의 신앙 감정 혹은 신앙 체험은 잠재적·잠정적인 채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기실 “아버지의 생각”을 “내 편에서” 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입니까?
그와 달리 신앙의 현상학은 앞서 간 신앙 선조들에 의해서 오롯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으니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에게로 한 걸음씩 옮기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육신으로는 거리가 떨어졌고 성령으로 또 역사상으로 나타난 이들을 통하여 그들의 발자취를 마음에 모아 그들을 믿고 될수록 예수에게로 가까이 하여 실감이 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80-381쪽) 매우 간단한 신앙 사건의 가능성을 일정한 권위 위에 두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가능성은, 신앙의 정신화는 그 자체가 과도하게 오염되어 있거나 개인화되어 타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한 적법한·적절한 서사가 될 수 있습니다. 특권의 계층, 그들 자신의 정신화도 아닌 권위로 도배가 된 신앙의 양식만이 마치 신앙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모든 종교인을 어린이 취급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역사적 선조들의 발자취는 독단의 아버지나 초자아적 아버지가 아니라 목가적·유목적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학습되거나 검열되거나 거세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특권 계층은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욕망을 억압하려고 하지만,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결핍을 위험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모두에게는 신앙의 서술(서사) 양식인 경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참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종교 서사의 범주와 내용은 만인에게 열려있고 침묵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그 서사와 진리 서술을 삶과 현실로 번역하고 옮길 때, 즉 삶으로 살 때 그 자체가 드러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깨달으려면 우리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열리지 않고는 성경의 참 가르침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철두철미하게 현실에 참여하여 그 속에서 하느님의 참 말씀을 드러내는 것”(함석헌, 위의 책, 381쪽) 또한 중요합니다. 종교의 서사 범주와 내용인 경전은 생활세계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세계를 복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독자는 종교의 서사와 내용을 강박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증발해버린 삶을 도식화하고 축조하려고 합니다.
“마르셀(G. Marcel)에 의하면, 신앙과 자유 간에는 내적 연관이 있습니다. 신앙은 그 자체 다른 사람들과 신에게 약속을 이행을 다짐하는 자유로운 활동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명제적 진리에 대한 지적(知的)인 동의로서 기술되기보다는 신뢰로서 기술됩니다. 마르셀은 ‘~라고 믿는 것’과 ‘~을 믿는 것’을 구별합니다. 신앙은 ‘~라고 믿는 것’과 관련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라는 명제’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을 믿는 것’을 통해서만 표현됩니다. 다른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신뢰감을 심어 준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가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나의 희망에 보답할 것이며, 나의 희망을 성취시켜 줄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과의 신뢰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마르셀은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신뢰와 약속 이행의 접합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자유롭게 신과의 계약관계에 들어갑니다... 마르셀에게 있어 초월은, 시간상의 초월(단순한 수평적 초월)이 아닙니다. 초월에는 수직적 차원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것에로의 초월입니다. 초월의 경험은 초월적인 존재자의 삶에 참여함으로써만 성취됩니다.”(전재원, 로고스와 필로소피아, 경북대학교출판부, 2014, 90-91쪽)
유한적이고 시간적인 것을 넘어서서 영원한 것에로의 초월을 추구한 마르셀의 존재철학처럼, 지금까지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종교 서사와 서술, 그리고 그 내용을 생활세계에서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의 자율성과 신앙의 현상과 판단, 그리고 타자에 대한 본능과 초자아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과 이기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종교의 현실이 어두울수록 종교지도자들의 불신과 이중성은 날로 더해가는 듯합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을 간파한 교
황이 자신의 사목적 행보를 통해 전 지구적 차원에서 가톨릭의 신앙 쇄신을 꾀하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조셉 캠벨은 언젠가 진정한 사람 하나가 세상에 다시 활기를 가져다준다고 말했”(Davidson Loehr, 정연복 옮김,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샨티, 2007, 80쪽)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취임과 그 이후의 사목적 언행과 실천이 부디 세계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의 현존재적 종교 행위, 그리고 사목적 결단과 발언마저도 한갓 종교와 신앙의 허위, 종교적 가식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종교의 난감함과 한계, 그리고 교황방문에 대한 만념(萬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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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자 혹은 초월자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서 죄와 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석헌은 초월자에 대한 상상력의 수행이 신앙 감정의 사건이 발생된다고 믿습니다. 상상력은 개별자들에게 모두 주어져 있는 자율성이지 특정 계층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유로운 사건과 행위를 막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력과 그에 대한 해석, 그리고 신앙 지침은 특권 계층에게 있는 것처럼 통제하고 선언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의(THEIR) 해석학을 통해 상상력을 독해하기 전까지는 개별자의 신앙 감정 혹은 신앙 체험은 잠재적·잠정적인 채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기실 “아버지의 생각”을 “내 편에서” 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입니까?
그와 달리 신앙의 현상학은 앞서 간 신앙 선조들에 의해서 오롯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으니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에게로 한 걸음씩 옮기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육신으로는 거리가 떨어졌고 성령으로 또 역사상으로 나타난 이들을 통하여 그들의 발자취를 마음에 모아 그들을 믿고 될수록 예수에게로 가까이 하여 실감이 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80-381쪽) 매우 간단한 신앙 사건의 가능성을 일정한 권위 위에 두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가능성은, 신앙의 정신화는 그 자체가 과도하게 오염되어 있거나 개인화되어 타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한 적법한·적절한 서사가 될 수 있습니다. 특권의 계층, 그들 자신의 정신화도 아닌 권위로 도배가 된 신앙의 양식만이 마치 신앙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모든 종교인을 어린이 취급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역사적 선조들의 발자취는 독단의 아버지나 초자아적 아버지가 아니라 목가적·유목적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학습되거나 검열되거나 거세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특권 계층은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욕망을 억압하려고 하지만,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결핍을 위험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모두에게는 신앙의 서술(서사) 양식인 경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참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종교 서사의 범주와 내용은 만인에게 열려있고 침묵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그 서사와 진리 서술을 삶과 현실로 번역하고 옮길 때, 즉 삶으로 살 때 그 자체가 드러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깨달으려면 우리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열리지 않고는 성경의 참 가르침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철두철미하게 현실에 참여하여 그 속에서 하느님의 참 말씀을 드러내는 것”(함석헌, 위의 책, 381쪽) 또한 중요합니다. 종교의 서사 범주와 내용인 경전은 생활세계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세계를 복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독자는 종교의 서사와 내용을 강박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증발해버린 삶을 도식화하고 축조하려고 합니다.
“마르셀(G. Marcel)에 의하면, 신앙과 자유 간에는 내적 연관이 있습니다. 신앙은 그 자체 다른 사람들과 신에게 약속을 이행을 다짐하는 자유로운 활동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명제적 진리에 대한 지적(知的)인 동의로서 기술되기보다는 신뢰로서 기술됩니다. 마르셀은 ‘~라고 믿는 것’과 ‘~을 믿는 것’을 구별합니다. 신앙은 ‘~라고 믿는 것’과 관련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라는 명제’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을 믿는 것’을 통해서만 표현됩니다. 다른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신뢰감을 심어 준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가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나의 희망에 보답할 것이며, 나의 희망을 성취시켜 줄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과의 신뢰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마르셀은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신뢰와 약속 이행의 접합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자유롭게 신과의 계약관계에 들어갑니다... 마르셀에게 있어 초월은, 시간상의 초월(단순한 수평적 초월)이 아닙니다. 초월에는 수직적 차원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것에로의 초월입니다. 초월의 경험은 초월적인 존재자의 삶에 참여함으로써만 성취됩니다.”(전재원, 로고스와 필로소피아, 경북대학교출판부, 2014, 90-91쪽)
유한적이고 시간적인 것을 넘어서서 영원한 것에로의 초월을 추구한 마르셀의 존재철학처럼, 지금까지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종교 서사와 서술, 그리고 그 내용을 생활세계에서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의 자율성과 신앙의 현상과 판단, 그리고 타자에 대한 본능과 초자아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과 이기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종교의 현실이 어두울수록 종교지도자들의 불신과 이중성은 날로 더해가는 듯합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을 간파한 교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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