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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민중의 정치철학과 역사철학

by anarchopists 2019. 10.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8/19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민중의 정치철학과 역사철학



혁명(革命)이 하나의 혁명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혁명이 결단코 무(Nichts)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혁명은 정치가 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부분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부, 함석헌식 언어로 말하자면, “왼통 뜯어고치는 일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25쪽) 전체를, 모두 다, 정치를 새롭게 하는 것은 정치의 존재 방식, 정치가의 존재를 새롭게, 달라지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혁명은 무화시키는 것이라 생각해서 정치적 공포와 두려움으로 정치 현실은 늘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정치적 장(political field), 정치적 존재의 무화가 아니라 하늘 말씀의 충실과 성실이었습니다. 정치 지도자는 하늘이 낸다고 볼 때, 정치적 실존, 정치적 현존재는 하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25쪽). 정치적 실존은 하늘의 뜻[天命]을 민중들과 함께 실현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다고 해서,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자는 아닙니다. 하늘의 뜻과 민중의 뜻은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민중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곧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늘의 뜻을 간파한다기보다 민중의 뜻을 간파해야 선택받는 정치적 실존으로 손색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26쪽).


그러므로 정치의 의미는 민중의 뜻을 받드는 데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나라의 주체는 민중”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주체가 임금 혹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수반세력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정치적 주체는 항상 민중입니다. 그럼에도 민중을 정치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정치가를 정치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민중의 뜻과 생각이 달라진다면 정치 또한 달라져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물론 민중의 뜻과 생각이 항상 정치적 이상을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 이상 역시 민중의 뜻과 생각을 근본으로 하여 설정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된 점은 생각하는 데... 자기를 가지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26쪽)라고 말하듯이, 정치적 욕망에는 민중의 현실, 민중의 뜻, 민중의 생각이 작용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민중이 생각이 없고 주체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듯이 정치적 실존, 정치적 존재들이 그들을 몰아세운다면, 혁명은 반쪽짜리 혁명이 되고 맙니다. 정치가 완전히 달라지려면 민중의 깨인 의식과 행동을 정치의 실존적 참여의 주체로서, 그들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의 역사, 곧 정치의 역사는 주체인 민중에 의해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존재, 정치적 동물로서의 민중은 정치와 역사를 통해서 모험의 길인 생명의 길을 모색하려고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27쪽) 정치와 역사는 잠정적으로 모험입니다. 내딛지 않은 길을 가려하기 때문에 위험한 모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정치 현실은 실존적으로 민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위험의 가능성, 모험을 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적 실존들이 단지 권력 쟁투나 밥그릇 싸움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정
치 세계가 갖고 있는 우연성이나 부정성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롭다 하는 데는 목적의식이 들어 있습니다... 진보라 하는 이상, 무의식 속에 나마라도 어떤 의미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현재는 늘 새 출발을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끊임없는 혁명일 수밖에 없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27쪽) 정치는 민중의 삶과 역사가 진보하기 위한 것이고, 의미 실현입니다. 진보하기 위해서는 늘 새로워야 합니다. 정치는 서로 다른 생각들을 의미 없이 다투는 에너지의 소진, 당쟁이나 정당의 이익을 위해 분투한다거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정치적 전략보다 민중을 앞세우는 생각입니다.


함석헌은 늘 ‘생각’을 말합니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민중, 이 민중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기억하고 상상하며 성찰하는 존재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28쪽). 민중은 이렇게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이성과 감성으로 새로운 역사를 기획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민중의 실존적 지향, 시간성 안에서의 인식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지배자는 지금까지 보수적이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민중의 생각을 조직적으로 짓밟아 왔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역사의 걸음을 방해하는 악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과학적으로 하는 투쟁 그것이 곧 정치요 혁명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28쪽)라고 말합니다. 정치와 역사의 진보를 방해하는 세력들에 대해서 투쟁하는 일, 민중의 길, 민중의 정치 세계를 무화시키려는 정치적 엘리트나 정치적 열망에만 사로잡힌 자들을 정치적 장으로부터 추방하는 것이 혁명입니다. 민중은 정치적 실존을 획득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 합니다. 민중 스스로 정치적 실존이나 정치적 주체가 되려면 새로운 인간, 즉 초인, 자기 극복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계몽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진화해 나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소수의 권력자는 민중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민중의 의식을 무화시키려고 합니다. 민중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 새로운 존재, 역사의 주체,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29쪽).


그렇다면 그것(혁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폭력주의인 국가주의에 맞서고 공(公)을 우선으로 하고 사(私)를 나중으로 하는 데 있습니다. “혁명의 목적은 공(公)을 살리기 위해 사(私)를 죽이는 데 있습니다... 공을 위하는 것이 정신입니다... 세계가 곧 공입니다... 살아도 인류 전체가 같이 살고 죽어도 인류 전체가 같이 죽게 된 것이 오늘의 세계의 현실입니다... 하나로서의 세계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0쪽) 민중은 낱개로서, 개별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개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존재적, 함께 있음으로 존재하는 것임으로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류, 종교, 도덕, 정의 등 전체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전체 연관성입니다. 민중으로서의 전체를 살리는 것이 혁명입니다. 민중과 전체 사이의 거리가 소멸되는 것, 그것이 혁명입니다. 민중은 전체로서 세계에 나타납니다. 그렇게 될 때 국가주의에 의해서 개별적 민중이 와해되지 않습니다. 민중이 전체의 핵심이자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민중은 국가가 아닙니다. 민중은 생각이고 깨어난 의식입니다. 생각과 의식이 사람의 규정이라면, 그 전체의 인격이 곧 민중이 될 수 있습니다. 조직이나 체제도 아닙니다. 민중은 생각하는 존재 전체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1쪽 참조)


이제 새 인류의 도래를 고대해야 합니다. 개별적 존재, 민중의 자유가 보장되는 전체, 생각을 전체로서 하는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1쪽)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선행하는 것으로, 본질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존재의 본질은 인간의 자유 속에서 공중에 매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
라고 부르는 것을 ‘인간존재’의 ‘존재’와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런 다음에’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자유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Jean-Paul Sartre, 정소성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78쪽) 혁명은 죽이는 것, 혁명은 과거를 무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혁명은 민중의 뜻과 하늘의 뜻을 일치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민중의 생각과 정신을 무화시키려 하지 말고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실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민중이 전체라는 의식, 민중이 단순히 관념이 아니라 민중이 정치 현실이자 정치 주체라는 인식이 정치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민중과 혁명은 추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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