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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민중, 씨알철학을 가진 자

by anarchopists 2019. 10.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8/12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민중, 씨알철학을 가진 자



함석헌이 말하는 ‘봄’이라는 것, ‘본다’라는 것은 단순히 시지각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봄’의 부정성으로서의 ‘안 봄’과 ‘참 봄’의 부정성으로서의 ‘겉 봄’을 구분하고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11쪽). 그러면서 지금의 시대가 참 봄이 아니라 겉 봄의 시대라고 비판합니다.
어쩌면 그의 봄(시각 및 인식)의 철학은 시지각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식론적이며 계보학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본다’(see, voir)는 행위는 인식론적으로 ‘안다’(savoir)라는 정보의 습득과 남김 없는 타자의 파악, 그에 따른 조정과 ‘소유’(avoir)까지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정말 본다는 것은 안 봄, 즉 비폭력적인 무시선적인 태도가 진정한 봄이라고 합니다. 흘끗 봄, 사적 관심이나 이익을 가지고 타자를 바라보는 행위는 타자에 대해서 거리를 한껏 좁혀 인식론적으로 포착, 자기 것화 하려고 하기 때문에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존재를 인식하되 완벽하게 인식하겠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시각적으로, 시신경 안으로 들어온 정보는 지극히 선택적 정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보는 즉시 우리는 판단의 과정 속에서 타자를 전부 이해했다고, 세계를 다 알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함석헌이 말한 ‘겉 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합니다. 뚫어봄은 생각하는 데서 나옵니다”(함석헌, 위의 책, 12쪽). 생각은 존재의 기본 행위, 존재의 근원적 본질을 특징짓는 행위입니다. 생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무슨 생각이든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한다고 해서 다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은 현상을 깊게 뚫어 볼 수 있는 사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의 생각이 영구불변한 생각일 수 없듯이 생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합니다. 변해야 생각입니다. 하지만 생각 없이 생각을 하면 생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모순, 즉 ‘무생각’이 되고 맙니다. 생각이 아예 없는 것입니다. 뚫어봄, 즉 세계와 현상을 올바르게 꿰뚫어보는 인식론적 통찰력을 올바르게 갖지 않는 이상, 그것을 생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정보를 갖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오성적 인식으로는 부족합니다. 자기 동일성인 이성을 가지고 사태를 정직하고,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비판력이 있어야 합니다.


함석헌이 왜 남들이 다 싫어하는 사상의 넝마주의를 자처했을까요? 왜 인생의 넝마주의, 역사의 넝마주의가 되겠다고 주저 없이 말했던 것일까요? 그 근저에 “혁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쓰레기를 줍는 넝마가 곧 혁명이기 때문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14-15쪽). 생각을 통하여 흩어져 범주화·종합되지 않은 온갖 사상의 쓰레기, 정신의 쓰레기를 한곳으로 모으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쓰레기가 인류를 지탱하는 사유와 정신,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함석헌 스스로 민중의 사유를 결집시키고 한곳으로 모아 생각하게 하는 선구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넝마주의자는 아무나 될 수가 없습니다. 쓰레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 생각과 시선이 제대로 된 쓰레기를 모음, 곧 사상과 정신, 역사의 넝마주의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정신과 사상이 모이게 되면 인류를 보는, 세계와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를 보는 시선과 생각이 달라져 결국에는 혁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민중이 깨어 생각하고 스스로 정신을 계몽할 수 있다면 역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넝마는 투쟁, 삶의 투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수단과 방편을 강구할 수 있을까요? 말과 글, 그리고 역시 생각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17쪽).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살림을 가져옵니다. 살리는 말, 살리는 글, 살리는 생각. 그런데 지금 살림은 죽음이 되고 생각의 흐름은 차단이 됩니다.
자본과 체제와 국가, 권력, 욕망에 의해서 말은 왜곡되고 글은 가벼우며 생각은 발달하지 못한 미숙아가 되어버렸습니다. “살림이 마르고 생각이 막힌 나라”(함석헌, 위의 책, 17쪽), 거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함석헌은 뜻을 강조하고 욕심을 버릴 것을 종용합니다. 말과 글, 그리고 생각에 뜻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살림의 뜻만이 죽어가는 인간 세계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뜻을 달리 말하면 살림의 철학, 살리겠다는 의지, 삶의 의지를 꺾지 않고 세우는 것을 지칭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짐승입니다. 욕심만 앞세우고 나 살겠다고 타자를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고 세계의 행복과 연대를 짓밟는 행위는 뜻없는 삶, 삶의 철학적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18쪽).


그러므로 죄는 네 죄 내 죄가 따로 없으며, 살림은 네 살림 내 살림이 따로 없습니다. 죄라면 전체의 죄가 있는 것이요, 살림이라면 전체 살림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전체요, 전체는 곧 나이기 때문에 서로 별개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18쪽). 나는 전체의 살림 앞에서 현전하는 것이요, 전체 속에서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전체 속에 나는 던져져서 전체의 살림을 위해 헌신하는 개별적 존재, 곧 나입니다. 그렇다고 전체를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수단적으로 강요하는 전체주의가 아닙니다. 전체의 살림이 곧 나의 살림이라는 전체가 개인보다 선행하는 사유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민중 전체가 사유 덩어리, 생각의 몸체로서 살지 않으면 개인의 살림 또한 유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민중은 자신의 속에 있는 생각과 의식을 하나하나 내뱉는, 다시 살림의 언어를 통해 언어적 체험, 체험적 언어가 서로 만나는 누에가 되어야 하는 누에의 철학, 나비의 철학이 필요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19쪽).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생성·변화하는 생명의 삶, 살림의 삶을 자아내는 철학, 곧 “새 시대의 말씀”(함석헌, 위의 책, 19쪽)입니다. 누에나 나비는 자기를 지양(止揚, Aufhebung)합니다. 자기 속의 존재는 그대로 간직하여 가지고 있지만 외양은 변하여 더 높은 세계로 나아갑니다. 자기 지양이 없이는 발전이 없습니다. 달리 말해 자기 존재의 변화가 없습니다. 존재의 살림, 즉 자신이 살고자 한다면 자기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또 그곳을 통해 운동을 해야 합니다(Jean-Paul Sartre, 정소성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63쪽). 자기 속의 말을 가지고 깨치고 자기 자신과 자기모순들을 무화시키면서 새로운 변화들을 모색해야 민중이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의 말로 자기 자신의 본질(본모습)을 설계하지 못하는 민중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누에나 나비는 끊임없는(자기부정), 외부로부터의 규정을 깨고 스스로 자신을 세우려 하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Spinoza,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Jean-Paul Sartre, 위의 책, 64쪽 재인용).


따라서 ‘살금살금’, ‘옴질옴질’ 먹는 민중의 삶이 요청됩니다. 민중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 천천히 잠식(蠶食)하면서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나비의 생활철학”이요, “씨알의 생활철학”입니다(함석헌, 앞의 책, 20쪽). 존재의 새로운 옷을 위해서 급할 것이 없습니다. 잠식하는 철학이면 됩니다. 민중의 존재를 조금씩 조금씩 세계의 핵심,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어가는 잠식이 된다면 민중은 삽니다. 국가, 자본, 체제, 권력 등으로부터 잠식당하지 않고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면서 다른 것, 다른 존재 변화로 넘어간다면 모든 규정, 모든 지배, 모든 철폐, 모든 부자유, 모든 무사유, 모든 무지, 모든 왜곡으로부터 벗어나는 흰 나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중은 잠식의 철학을 위해서 잠깐의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자본, 국가, 권력, 체제는 나비철학, 씨알철학을 와해(파괴)시키려 할 것입니다. 누에가 번데기가 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흰 나비가 된다는 것조차도 부정하게 하고 믿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전략입니다. 하지만 누에는, 번데기는 잠시 중단될 뿐 멈춘 적이 없습니다. 실을 자아내고 잠식을 하는 한, 언젠가는 흰 나비가 된다는 강한 긍정의 신념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한, 삶/살림은 계속 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씨알은 가만 못 있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9쪽). 민중의 의식은 항상 자기와 세계를 넘어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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