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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남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으로의 세계국가주의적 존재론(1)

by anarchopists 2019. 10.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7/22 02: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남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으로의 세계국가주의적 존재론(1)




지금까지의 인류사에서 정치적 플롯을 보면 민중이 주인이 되었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민중이 핵심이 되어 민중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그리고 민중의 생각에 의해서 정치가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입니다.
민중은 다만 일개 국가의 도구나 지배 계급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민중의 의식은 자발적으로 발로된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 혹은 소수 엘리트 계층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그 지식과 의식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말은 민중의 말이 아니었고, 민중의 생각은 민중의 생각이 아닌 지배 계급의 그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은 일찌감치 이를 깨닫고 “소수 사람이 지배하는 역사가 아니라 민중 자체가 결단하고 사는 세상”, 즉 ‘훌륭한 이들이 생각해 준대로 사는 세상이 되어선 안 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19, 영원한 뱃길, 한길사, 1985, 367쪽)고 설파합니다. 민중이 소수 엘리트와 지배 계급의 생각 안에(in)/사이에(inter)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관심(interesse)에 이끌려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함께(with), 그들의 생각에 의해서(by), 그들의 생각 안에(in)에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중은 민중과 함께, 민중에 의해서, 민중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between) 그들 안에 놓이게 됩니다(M. Roth, The Poetics of Resistance, Evanston, Illinoi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6, p. 53). 그래서 함석헌은 정치가들의 권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면서, “인류의 귀한 점이 생각하는 데 있는데 생각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민중의 생각은 민중 스스로 깨우친 생각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마저도 타자에게 지배된 것이고 그로 인해서 작동·조작된 것이라면 민중은 생각이 없는 존재입니다. 민중의 생각은 역사를 꿰뚫어 바로 볼 수 있는 주체적 의식이자 개별적 존재의 각성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존재론적 위치를 잃지 않고 늘 생생하게 그 자리를 탐색하고 확인하는 것이며, 미래로부터 앞당겨 오는 의식을 현재에 도래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늘 오고 있고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의 의식에 자신의 생각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생각을 국가에만 한정시켜서도, 국가에 의해서 지배되어서도 안 됩니다. 함석헌이 적시하고 있는 것처럼, “‘나라’라는 것은 이해가 상반되는 단체들이 있어 가지고 세워진 것이지 국민들이 계약을 하거나 협력을 하기 위하여 되어진 것은 아니다... 애기가 자란 다음에는 부모나 선생이 간섭할 수 없게 된다.”(함석헌, 앞의 책, 372쪽)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민중의 생각이 성숙해지고 민중의 주체의식이 강해질수록 국가(주의)가 침해하거나 간섭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의식은 그 개인이 안에서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으면서 끌어내는 것이지, 바깥의 조직이나 체제가 주입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개인의 의식과 이성이 상충될 때, 집단의 이념이 서로 다를 때,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놓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생겨난 것이 국가라는 최종산물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좀 더 외연이 확장된 것뿐이지, 나를 대표하거나 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또 다른 개인의 생각과 충돌하는 나와 대립이 생기고 갈등이 발생할 때, 하나의 통합된 나로서 집단적인 나의 생각과 조화를 이루고 타협·양보할 수 있는 나이지, 나의 생각이 말살되거나 사라지는 나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라도 나의 생각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함석헌이 “인간은 ‘나’를 가져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371쪽)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는 소통하는 ‘나’, 대화하는 ‘나’이어야 합니다. “생각은 소통되는 데 있습니다... 개인 사이의 대화, 민족이 대화를 통해서 내 것 네 것보다 놓은 데로 나갈 수 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369쪽) 소통과 대화를 통해서 더 높은 나로 나아가야 작은 ‘나’, 작은 ‘너’에서 ‘큰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세계국가주의”입니다. “나는 세계국가주의자다... 온 세계가 한 나라가 되기 전에는 이 세계에는 전쟁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싸움이 그쳐야 평화가 온다.”(함석헌, 위의 책, 371쪽) 나는 생각이 서로 다른 나와 맞서기(gegen)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족이라는 것도 다른 민족과 맞선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민중이 참여하는 역사”(함석헌, 위의 책, 371쪽)로서 서로가 서로를 맞서는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온 세계가 하나가 되는 평화로운 나라, 평화로운 세계를 말합니다. 나의 경험은 곧 세계의 경험이고 세계의 경험은 나의 경험입니다. 나와 세계, 나의 민족과 세계국가가 서로 맞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은 나의 민족의 생각, 나의 말은 나의 민족의 말로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국가적, 세계민중적 경험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중요합니다.


“지금의 민중은 국가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를 지배해온 것은 민족사상이었지만 이것은 민족이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의 지배자가 그렇게 말을 붙여온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68쪽) 민족의 이데올로기, 민족의 경계, 민족의 의식이 과연 민중의 것이었는가를 되짚어봐야 합니다. 그것이 지배자의 것이었다면 탈피해야 합니다. 지배 계
급에 의해서 명명되고 규정된 것이 모아지고(legein) 말하여진 혹은 읽힌 것(legen, lesen)이 민족사상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함석헌이 지적하고 있듯이, “민중이란 민족이 다르다고 해서 적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68쪽) 민중은 적의가 없습니다. 민중의 생각은 민족주의, 민족의 이념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생각은 열려 있습니다. 민중이 읽고 민중이 모아(legein) 비은폐시키려고(un-concealment) 하는 것은 세계국가주의 혹은 세계민중주의입니다. 항상 관계를 생각하며 평화를 말하는(logos) 주체는 지배 계급이 아니라 민중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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