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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경희 작가 칼럼

명절증후군- 시대의 아픔인가

by anarchopists 2019. 12. 1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9/13 06:22]에 발행한 글입니다.


명절증후군

서리가 하얗게 내린 새벽, 때때옷 젖을까 조심조심 풀 섶을 헤치고 큰댁으로 차례 지내러 가는 발길은 마냥 가벼웠다. 큰어머니께서 이미 한 달 전부터 준비한 차례 상에 절을 한 뒤 친척들이 오순도순 모여 앉은 식탁은 정이 넘쳤다.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에 비록 비싼 소고기국이 아닌 닭고기로 끓인 탕국이지만 맛있었다. 또한 온갖 전과 부침개들,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무지갯빛 알 사탕까지 풍성한 상차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느 집을 가든 풍성한 먹거리가 넘쳐 났다.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 장이 탈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연신 입 속으로 맛있는 음식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명절이 돌아오는 게 즐겁기보다는 부담스럽기 그지없게 되었다. 명절을 앞둔 일주일 전부터 주부들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왠지 짜증이 난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그래도 어김없이 명절은 돌아온다.

끝없는 일들. 먹을 게 넘쳐나는 세상을 살면서도 시어른들은 옛날 생각하며 무엇이든 많이 하길 바란다. 온갖 전도 부쳐야 하고 냉동실에 들어 가 다음 해 추석에야 꺼내어 버리곤 하는 송편도 해마다 빚어 쪄내야 한다. 무조건 많이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건, 가난한 시절에 대한 한이리라. 그 심정 모르는 바 아니기에 꾹 참고 따르다보면 가슴 깊은 곳에 묵직한 그 무엇인가가 얹힌 것 같다. 이름하여 ‘명절증후군’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성이 의외로 많았다.

‘명절증후군’ 이라는 말은 주부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올해는 특히 더 그렇다. 한 집안의 가장인 남편 역시 명절이면 들어가야 할 돈 때문에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가?

“시장 보기가 겁나요. 시금치 한 단에 4천원이라구요. 배추도 너무 비싸고. 배추보다 더 비싼 게 부수 재료란 말예요. 파며 미나리가 어찌나 비싼지. 차라리 김치 안하는 게 낫겠다 싶어요. 고기도 비싸고. 밀가루도 올랐고. 심지어는 소금까지 올랐으니. 점점 더 사는 게 팍팍하니...”

아내는 마트나 재래시장만 갔다오면 연신 돈타령이다. 지난 설 명절에 들었던 잔소리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다. 그 뿐인가.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명절이면 혹사 당하는 아내 입장만 두둔해 주고 있다. 남자들은 모처럼 형제끼리 모여 앉아 잠시 화투를 치는 것을 갖고 마치 범죄자 취급하듯 다그치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아이들도 명절이 즐겁지만은 않다. 주차장이나 다름없는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굉장한 인내심을 요한다. 운전하느라 힘든 아빠는 기회다 싶어 좁은 공간에 있는 아이들에게 평소에 못했던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실은 평소에 늦게 들어 와 얼굴 보기도 힘들게 만든 건 아빠였으면서도.) 엄마도 아빠의 잔소리에 맞장구를 친다. 아이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다리가 풀릴 만큼 온몸이 녹초가 되어 도착한 할아버지 댁. 처음에는 푸근한 할머니처럼 쉼이 찾아 온 것 같다. 하지만 인사를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것은 실망스런 말 뿐이다.

“아이쿠, 우리 강아지. 공부는 잘 하는 겨? 옆집 최 씨 할멈 손녀는 좋은 대핵교 들어갔다는디. 어찌 너는 몇 등이나 하는 겨. 최 씨 손녀보다 더 좋은 대학 들어가야 혀. 할멈 어깨 좀 들썩이게 해 달란 말이여.”

지겨운 공부 이야기다. 그것도 옆집 손녀와 비교하는 말. 그러려니 해도 기분은 개운치 않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잔소리가 끝나면 뒤이어 오는 친척들에게도 거의 비슷한 인사를 받는다. 성적으로 자신을 평가하려는 어른들이 모인 자리가 편할 리 없다. 아이들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시골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아이들 가슴에 자리 잡을 틈을 주지 않는다.

명절만 되면 한 자리에 모인 가족끼리 아름다운 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비교하며 스스로 상처 받는 경우도 많다. 돈 잘 버는 형과 비정규직 동생과의 보이지 않는 괴리 때문에 힘겨워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여자들 또한 사는 형편이 너무 드러나는 가족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가장 상처를 주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르신들 또한 명절이 지나면 몸살을 앓는다. 자식들 얼굴 보는 건 즐거웠지만, 보내고 나면 가슴이 짠하다. 전투하듯 도회지에서 이런저런 아픈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자식들 생각하며 한동안 가슴앓이를 해야만 한다. 세상 전체가 살기 힘든 만큼 아픈 사연도 너무 많다.

명절증후군! 어쩌면 이것은 이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말일 수도 있다. 정치가 부패하고 온 국민이 경제난에 허덕이는 한 명절증후군이 국민병이 될까 두렵다. 시간이 지나면 이 병에서 벗어날까 기대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날이 갈수록 병은 더욱 깊어가는 것 같다.

가난했어도 한가위를 소풍 가기 전날처럼 밤잠 설치며 기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조차 없었던 그 시대가 마냥 그립다.(2011. 9.12, 박경희)

박경희 작가님은
2006년 한국프로듀서연합회 한국방송 라디오부문 작가상을 수상했다. 전에는 극동방송에서 "김혜자와 차 한잔을" 프로의 구성 작가로 18년 간 일하다 지금은 탈북대안학교 '하늘꿈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의 필진이다.

작품으로는 《분홍벽돌집》(다른, 2009), 《이대로 감사합니다》(두란노, 2008),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고려문화사, 2006), 《천국을 수놓은 작은 손수건》(평단문화사, 2004)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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