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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경희 작가 칼럼

이명박 정부, 50대 은퇴자의 허망한 눈빛을 보시오

by anarchopists 2019. 12.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2/10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은퇴자들의 허망한 눈빛,
그들만의 문제일까

내 고향은 경기도 양평의 끝자락에 있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아직도 물을 끓이지 않고도 마실 수 있을 만큼 청정 지역으로 유명하다.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삶이 버겁다고 느낄 때면 고향을 찾는다. 예전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갔는데 요즘은, 중앙선 복선전철을 이용한다. 덕분에 시골에 내려 가 가랑잎처럼 말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친정어머니와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복선전철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데 중앙선 전철을 탈 때마다 안쓰러운 풍경을 목격하게 되는 건 유감이다. 전철 안에 탄 손님들은 대부분 등산객이다. 중앙선이 어느 역이든 산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기에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평일 대낮에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왠지 가슴이 아릿해진다.

아직은 노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나이. 그렇다고 중년으로 보기엔 너무 애매한 은빛 물결 출렁이는 머리. 새로 마련한 듯한 깔끔한 등산복 차림. 얼핏 들리는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도 금방 퇴직 한 오십 대 후반 정도의 남자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나마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전철이 생겼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자네나 나나 낙동강 오리 신센데 이렇게 산이라도 오를 수 있으니... "

몇몇 남자들이 헛헛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락없이 갓 은퇴한 중노인들이었다. 잠시 후, 말을 마친 사람이나 듣던 사람 모두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너무도 허망한 눈빛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결혼 해 자식 낳아 키우며 오십 중반까지 쉴 틈 없이 달려오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은퇴. 그 순간부터 원하지 않아도 노년이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이 땅의 수많은 가장들. 가족을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정작 자신을 위해선 아무런 준비 없이 현역에서 물러난 남자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인생 제 2막을 향해 또 다른 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방비 상태로 은퇴를 하게 된다. 오죽하면 중앙선 복선전철에 탄 삼분의 이 정도가 노년도 아닌 그렇다고 중년도 아닌 중노인들일까. 참으로 서글픈 풍경이었다.

저들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해 주어야 마땅한 일 아닌가?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묻고 싶었다. 졸업하고 3,40년 넘게 자신의 분야를 일궈 온 인재들을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내 몬 이 사회는 과연 건강한 것일까.

열심히 살아 온 저들을 등산복을 입혀 전철로 내몰기 전에 획기적인 계획안을 세워 인생 제 2막을 시작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아주 시급히, 그리고 절실한 문제다. 우린 그동안 노후정책에 대해 무성한 말잔치만 벌여 온 것 같아 안타깝다.

은퇴를 한 신사가 공공 사무소에 가 서류를 떼는데 직업란에 '무직'이라는 단어를 써 놓고 한동안 멍했다는 말이 특정인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의 일이다. 노후대책을 개인의 문제로만 떠미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은퇴 후에 연계될 수 있는 일자리 창출(일본처럼)이 시급할 때다. 청년 취업 대책 못지않게.

더는 고향을 내려 갈 때 햇볕 쨍쨍한 평일 날 복선전철에서 허망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남자들의 얼굴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일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은퇴자들은 산을 찾는 즐거움보다는 무엇이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재취업되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 일 것이다. 대통령은 물론 권세 높은 정치인들 또한 나이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2011.2.8., 박경희)

박경희 작가님은
2006년 한국프로듀서연합회 한국방송 라디오부문 작가상을 수상했다. 전에는 극동방송에서 "김혜자와 차 한잔을" 프로의 구성 작가로 18년 간 일하다 지금은 탈북대안학교 '하늘꿈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의 필진이다.

작품으로는 《분홍벽돌집》(다른, 2009), 《이대로 감사합니다》(두란노, 2008),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고려문화사, 2006), 《천국을 수놓은 작은 손수건》(평단문화사, 2004)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인터넷 다움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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