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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FTA에 대한 비판적 인식 2

by anarchopists 2019. 12. 1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6/21 12:12]에 발행한 글입니다.


자유무역협정(FTA)과 지구촌
그리스도인의 영성적 삶과 태도

만일 FTA에 대하여 전면 거부가 불가능하다면,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의 행복의 총합이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고려한 FTA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협상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물질적인, 혹은 경제적 가치만을 위한 편중된 이익만 생각한다면 그 협상은 약자를 고려하지 않은 소수 자본가들을 위한 잔치가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까지의 모든 협상 테이블에는 약자나 소리 없는 자연에 대한 배려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만 보아도 사태를 가늠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마저도 이 협상의 표층만을 바라보고 마치 협상이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영하는 어쩔 수 없는 삶의 모습인 양 호도하고, 자신의 삶의 질을 양보하면서까지 저항의지조차도 잠재우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FTA야말로 불편한 진실이라고 느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인이 FTA를 논하고자 할 때 반드시 영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물론 영성적 삶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경제적 혹은 물질적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영성을 운운하는 것은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들이 삶의 초월성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데, 그 가치의 전도가 오히려 종교인의 삶을 정당화시킬 수 있기에 보다 더 영성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종교의 영성은 바로 인간이 정신적 가치나 영적 가치를 우선시 한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는데, 지금 우리는 그 영성이라는 것을 마치 물질적 삶을 아우르는 것처럼 단정 짓고 타협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성은 물질을 배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물질이 인간의 삶을 실추시켜 악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주고 부단히 영성적 가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도록 만드는 것이 종교의 역할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물질적 가치만큼 인간의 영성이나 정신적 가치의 상승효과를 가져온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인간의 순수한 정신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이라는 것을 멀리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모든 영성가들의 공통된 주장이 아니던가.

따라서 영성적으로 산다는 것은 신앙의 기반을 물질에 두지 않고 영 혹은 정신에 기초를 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FTA가 강제하고자 하는 위협적인 경제적 행위를 결코 고운 시선으로 바라만 볼 수 없는 입장이다. 인간의 삶이 물질에 매몰되어 초월의 가능성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FTA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총체적 행복에 두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차원에서 영성은 지금 맞닥뜨린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유하도록 우리를 일깨운다. 그 사유의 실천은 다름 아닌 ‘아스케제’(Askese)에 있다.

어쩌면 FTA에 대한 논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협정체결 혹은 협정의 발효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에 대한 속 깊은 문제의식과 함께 우리 스스로 삶의 패턴과 양식을 바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소비와 소유라고 하는 근대적 삶의 양식이 익숙하게 다가오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의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는 나의 욕망을 제어하는 영성적 훈련과 영성적 제어가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나의 근본적 자아마저도 잠식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는 “내가 누구도 아닌 자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 그것을 FTA가 원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욕망하는 추동장치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조차도 ‘의식주’라는 인간의 욕구로 포장된 낯선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현상으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의식주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달래는 삶의 방편이면 족하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모든 삶의 욕구는 과잉된 욕망으로 탈바꿈하고, 그것마저도 영성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식주는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이지만, 이제는 무한 욕망이 되어 버렸다. 그 욕망을 과도한 도착적 환상으로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메커니즘을 간파하면서 의식주에 대한 아스케제를 개인 및 교회 공동체적으로 체현하지 않는다면, 의식주는 이제 욕망의 충족 수단을 넘어서 편중된 잉여와 결핍을 가져오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주를 아스케제의 영역에서 인식하고 삶의 위기의식으로 받아들이면서 적게, 작게, 낮게, 좁게, 느리게 등의 '부사적 삶'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적 행복을 자족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성직자뿐만 아니라 수도자는 특별하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두가 정치, 경제, 환경, 문화, 예술 등의 영역에서 성소자(聖召者)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부르심에 일치하며 살아간다면, 새로운 대안적 삶의 공동체, 새로운 대안적 삶의 유형들로 인해서 발생한 참다운 성소적 삶이 FTA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다 같이 더불어 사는 길, 공동체를 존중하는 길, 타자를 배려하는 길, 삶을 계량화․수치화하지 않고 자연과 호흡하는 길 등을 순명으로 여기며 사는 방식에 있다. 이 성소는 전세계에 걸친 선진국의 무모한 경제적 사행(射倖) 혹은 경제적 사행(邪行)을 저지하는 사물에 대한 방기(放棄, verlassen), 시공간의 방기 즉 놓아-둠 혹은 놓아-버림에서 극치를 이룬다.

그러므로 모든 것과 모든 곳을 경제적 토포스(topos)로 여기는 강대국의 점령 논리가 아닌 그 어느 곳도 하느님의 토포스가 아닌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FTA가 정치경제적 영역을 넘어서 영성적, 생태적 관심의 마당[場]에 있다는 것을 참으로 알게 될 것이다(2011/06/21, 지금까지의 글은 가톨릭의 <미래사목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월간신앙잡지 <사목정보>에 실린 글입니다).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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