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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교회 안에 신은 있는가-참된 영성

by anarchopists 2019. 12. 1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6/24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1. 씨알 함석헌의 영성
2. 무아 방유룡의 영성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하나님을 흠숭하고 우러러 뵈라!”

무아 방유룡(1900-86)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한 사제이다. 그의 영성으로 대표되는 “면형무아”(麵形無我)는 성만찬(성체성사)을 이룰 때 빵의 실체는 없어지고 그 형상(麵形)만 남아 무가 되신 그리스도가 오시어 면형이 되시듯 우리도 하나님과 합일이 되기 위해서는 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면형은 무이며 예수는 이 무에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와 같이 있으려면 우리도 무가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가 되기 위해서는 죄, 사욕, 분심잡념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물질, 혈육, 명예, 안락, 권력, 지식, 선업, 덕행, 영적 욕망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것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비워야 한다. 무가 될수록 하나님과 합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무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열려진 비움의 자리, 케노시스(空)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자리, 자기중심적 자리가 아닌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는 인간의 성화 즉 무사무욕(無邪無慾)을 말한다.

방유룡 신부는 이렇게 무인 하나님과의 합일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닮고 무인 면형을 당신과 일치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 무아가 되려면 우리는 “점적”(點的)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이른바 ‘점성정신’(點性精神)이다. 이 점성정신은 마치 점이 형체는 없고 위치만 있을 뿐이지만 모든 도형의 기초요 시작인 것처럼, 영성적 삶에 있어서 알뜰하게, 빈틈없이, 규모있게, 정성스럽게 하라는 네 가지 행동지침을 말한다. 이것은 일반 사회생활에서도 성실한 삶을 살면서 타인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삶을 일컫는다. 더 나아가서 인간과 모든 사물들에 대해 ‘정성스럽게 대한다’라는 의미는 달리 말하면 ‘물질의 영성화’에까지 미치는 영성적 태도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침묵’은 단순히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욕을 없애는 것이다. 깊은 영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정신을 수렴하고 마음을 모으기 위해서 하는 침묵수행은 물론이고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간에 하나님이 아닌 일체의 것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안에서 자아를 철저히 무가 되게 하는 일체의 행위를 침묵이라고 한다. 이러한 깊은 내적 침묵을 통하여 영혼이 하나님께 몰입되면 될수록 그 사람의 말, 얼굴, 움직임 등이 모두 ‘하나님답게 되는 것’입이다.

방유룡 신부는 모든 것을 뛰어 넘어가서 하나님을 대하는 것, 하나님을 뵈옵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 몰입되는 것을 “대월”(對越)이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친하게 사는 생활이며 하나님과 내가 환히 통하는 삶이다. 그는 이러한 대월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대월삼칙(對越三則)을 제시한다. “내 자작으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을 말하고 행한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만 한다”가 그것이다.

방유룡 신부가 제시한 면형무아의 삶을 사는 수덕적 방법들은 점성정신으로 침묵과 대월생활이며, 이것을 구체적인 항목으로 푼 것이 완덕오계(完德五誡)인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1은 분심잡념을 물리치고, 2는 사욕을 억제하고, 3은 용모에 명랑과 평화와 미소를 띄우고, 언사에 불만과 감정을 발하지 말고, 태도에 단정하고 예모답고 자연스럽고 귀엽게 하고, 4는 양심불을 밝히고, 5는 자유를 하나님께 바치고 그 성의를 따를지니라.”

이 완덕오계 중에서 처음 3계는 침묵에 속하고, 5계는 대월에 속합니다. 제4계의 양심불을 밝히라 한 것은 침묵과 대월 모두에 관련된다. 왜냐하면 양심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는 눈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또한 빛으로서 우리 영의 눈을 밝게 하여 내 안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을 보게 하고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늠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가린스러운 마음을 비워야 할 것이다.

3. 영성, 절대무 안에 파고들기 위한 절대적 비움을 향한 삶의 태도

절대무 안에 거하기 위해서 먼저 비워라. 그것이 교회사 안에서 성인들의 가르침이고, 영성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데 유혹이 되는 삶의 모든 요소들을 비우는 것이 절대무로의 접근성을 높이는 길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어느 순간부터 신앙에서 물질적 인식과 물질적 척도가 유혹이 아니라 매혹적인 모습으로 아비투스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거 같다. 지탄의 목소리가 들릴 때는 이미 늦은 것이고 종교의 본래성이 많이 퇴색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비우지 못하고 배가 부른 교회, 비우지 않아서 비대해진 영성과 지성에서는 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그 안에서 절대적 순수의 현현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이미 구조화되고 내면화되어 버린 종교의 양식과 외형, 그리고 정신적 체계는 정련된 신앙의 순수성을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영성을 회복하자고 하는 데에는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교회 성장의 도구나 만들자고 하는 것도 신자들의 신앙의식을 고취하자고 하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영성을 운운하는 것은 바로 그 신앙의 근본이 되는 삶의 자세를 추구하자는 것이 아니던가. 물음을 제대로 던져야 그나마 근사치에 해당하는 답을 구할 수 있을 터인데, 한국교회는 애초에 물음을 자신에게 던진 것이 아니라 사용가치나 부가가치를 가지고 오는 대상을 염두에 두고 물었으니 엉뚱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참된 영성적 물음은 오늘 우리는 여전히 스승이신 예수를 나의 참 얼나로 모시고 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가여야 한다.

그 예수의 삶을 원본적으로 구현해 내고자 할 때 교회가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음을 세계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신앙을 실존적으로 해체하고 새롭게 구축하자. 만일 지금 교회들이 이카루스와 같은 상황이라면 더 이상의 아련한 알렉산드리아적 향수에 젖어 있지만 말고, 초월을 향한 모방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설령 닿을 수 없더라도, 혹 모방을 통한 그와의 차이와 구분이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 하더라도 그 차이와 구분이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즉 영성을 가능케 하는 근본자리이자 그 열정의 외줄타기가 신앙적 망상과 이상을 판가름하는 본래성임을 알아야 하리라(2011/06/24.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인터넷 다움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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